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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웅 Jan 24. 2023

한겨레신문의 작은 위기, 한국 사회의 큰 기회

법조기자단

 

 법조기자단이란게 있다. 법원과 검찰의 기자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자들을 말한다. 가입 조건이 까다롭다. 반 년동안 최소 3 명이상의 기자로 팀을 꾸려 법조 기사를 써야 지원자격이 주어진다. 가입하려면 각각 대검찰청·서울중앙지검·서울중앙지법 기자단 3분의 2 이상 출석과 과반수 찬성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각사 최고참 팀장들이 주로 있는 대법원 기자단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기자단은 소속 기자에 대한 징계권도 가진다. 문제는 가입도, 징계도 별다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런 촌극도 생긴다

.  

 “오00 기자라고 영세 매체에 속한 기자가 겪은 일을 소개를 해 드리자면, 경찰 취재를 하려고 했는데 경찰관의 연락처를 몰라서 서울경찰청 출입기자에게 연결을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출입기자가 하는 말이 연결을 해 줄 테니까 그럼 오 기자 네가 취재하고 있는 단독 아이템을 나한테 줘라. 그러면 기자단 가입 투표를 할 때 내가 찬성표를 던져주겠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2020년 11월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병폐의 고리, 검찰 기자단을 해체시켜주십시오”라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청원은 34만3,622명의 국민 동의를 받았다. 이 글은 정연주 전 KBS 사장의 오마이뉴스 기고 “검찰 기자단, 참으로 기이한 집단”을 인용한다. “지금은 매체 환경의 변화로 개방적인 브리핑룸 제도로 많이 바뀌어가는 추세지만, 검찰 등 법조, 경찰, 서울시 등은 여전히 폐쇄적, 배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검찰 등 법조 기자단의 특권, 폐쇄성, 배타성, 권위주의는 완강하여 기자단의 ‘마지막 성채(城砦)’로 불리기도 한다” 


 석진환과 법조기자단

 

 지난 9일, 한겨레신문의 사장과 편집국장이 사퇴했다. 한겨레의 법조팀장과 사회부장으로 일했던 석진환 기자가 대장동비리와 연루된 김만배로부터9억원을 차용증도 없이 빌린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김만배는 10여년동안 머니투데이의 법조팀장을 지냈다. 그는 ‘기사를 쓰지 않는 기자’로 유명했다

. 2012년 1월1일부터 2018년 12월31일까지 7년동안 그가 쓴 기사는 200건도 안된다. 그나마 그중 다수는 법조팀 기자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기사를 쓰지 않는 십여 년 사이 그는 기자실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석진환과 김만배는 말하자면 법조기자단의 동료였다.  


 한겨레신문은 9일 사고에서 “시민의 힘으로 1988년 창간된 한겨레입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역할, 다른 자세로 권력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을 기대하고 시민들이 만들어준 언론입니다. 한겨레가 어디서 무뎌졌는지, 무너지고 있는 건지, 참담한 마음으로 바닥부터 점검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한겨레신문은 법조기자단에 속해 있었다. 기자단에 속해서 대체 무엇이 나빴던 걸까? 9억 수수는 석진환 기자의 개인적인 일탈일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전해졌다, 알려졌다 

 

  기자실에 속한 기자들의 공통점중에 하나는 “알려졌다”, “전해졌다”를 아주 즐겨 쓴다는 것이다. 1월 16일자 한겨레신문 기사다. 


“검찰은 이 대표 쪽과 출석일자를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검찰이 출석을 요청한 날짜는 설 연휴 뒤 1월 말께로 전해졌다.” 


상대가 절정의 고수여서 천리전음(千里傳音)이나 육합전성(六合傳聲)이라도 쓴다는 걸까? 어떻게 주어도 없이 전해지고, 알려질 수가 있을까? 누군가 초절고수가 있어 공기중에 이런 소식을 실어서 기자의 귓속에 넣어주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법조계 전체의 의견을 파악하는 것도 굉장히 수월하게 한다. 법조인은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법조인이다. 이들이 일하는 곳을 묶어 통칭 법조계라 한다. 수가 아주 많을 수 밖에 없지만 법조기자는 기자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금새 전체 여론을 알아낸다. 2020년 11월 22일 한겨레신문의 기사다.  


 “법조계에서는 “혐의가 드러난 이상 기소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물론 “로펌 등에서 비일비재한 일인데, 기소까지 하는 건 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기소 여부를 두고는 입장이 갈려도 “최 비서관이 이런 상황에서 검찰 인사 등에 계속 관여하며 공직기강을 다루는 건 비정상적”이라는 데는 생각들이 같았다

.” 


그 많은 법조인들이 죄다 생각이 같은 것을 기자실에 앉아서 금새 알아낸다. 엄청난 내공이다. 어떤 의견이 우세한지도 척척 짚어낸다.  


검사가 자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거가 충분한지 아닌지도 대번에 알아낸다. 올해 1월16일 한겨레신문 기사다.  

   “검찰은 이 대표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이는 모양새다. 검찰 관계자는 앞서 기자들을 만나 “수사팀은 지난해 7월 구성된 이후 재조사를 통해 충분한 인적·물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한 바 있다.” 


2022년 10월31일 한겨레신문 기사다.  

  “검찰은 대면 조사 과정의 어려움과 별개로, 김 부원장의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인다. 이미 상당 부분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그래도 양반인지 모르겠다. 동아일보는 숫제 검찰의 기소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알아챈다. 2021년 5월 15일 기사다.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김 전 차관 관련 의혹을 조사하던 이규원 검사는 당시 청와대에서 정부 부처의 과거사TF 업무를 담당하던 이광철 당시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으로부터 김 전 차관의 출국 시도를 듣고 “대검의 승인이 없으면 출금이 안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전 선임행정관은 조 전 수석에게이 같은 얘기를 전달했고, 조 전 수석은 윤 전 국장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 


 마치 기자가 본 듯이 쓰고 있지만, 실은 검찰이 기소장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기소장이 곧 사실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들이 모두 기자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법조계’는 말하자면 ‘내가 검사 두셋을 만나서 들어보니’ 혹은 ‘점심을 같이 한 검사가 얘기하는데’와 같은 말이다. 양심이 있으면 여기에 전화 통화를 한 전직 판사나 검사 출신 변호사 두엇이 추가된다.

 왜 주어도 없이 ‘전해지고’, ‘알려진’ 것일까? 기사를 흘려주는 검사 이름을 밝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공표)는 다음과 같다. ‘검찰, 경찰 그 밖에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소제기 전에 공표(공표)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검사는 피의사실을 흘려 여론에서 우위를 점하고, 기자는 <단독>을 붙여 하루치 먹을 거리를 얻는다. 기자실의 공생관계다. 그러니 자신에게 기사거리를 흘려주는 검사를 위해 출처를 숨기고, 때로 ‘자신감을 보였다’는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누구의 말을 인용할 때 반드시 ‘말했다’(said)라고 쓴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래야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내비쳤다’, ‘~라고 분노했다’, ‘~라고 비난했다’, ‘~라고 일축했다’는 식으로 써선 안된다. 기자의 주관적인 인상이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다. 팩트를 기자 개인의 감정과 섞어선 안된다.

 주어도 없는 ‘전해졌다’, 알려졌다’가 황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라는게 중론이다’도 이상한 말이다. 여론조사를 한 것도 아닌데 중론인건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한겨레신문은 종종 ‘검찰의 편에 선다’, ‘변했다’는 비난을 듣는다. 조국 사태 때도 그런 말이 많았다. 한겨레쪽에서 억울해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가 양쪽 의견을 고루 듣고 반대의견도 실어줬는데, 무슨 소리냐?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라는 얘기냐!’  


 한겨레가 외견상 균형있게 양쪽 이야기를 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자실에서 ‘알려지고’, ‘전해진’ 얘기들을 주어도 없이 실을 때, 검사들이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이는 모양새’라고 쓸 때 당신은 이미 누군가의 편을 들고 있다. ‘혐의 입증에 자신감을 보인다’고 개인적인 인상을 섞어 쓸 때 당신은 듣는 이로 하여금 ‘유죄 증거가 있나 보네’하는 생각을 호출한다. ‘법조계의 중론이다’를 근거없이 말할 때 당신은 균형을 깨트린다. 판검사 두셋, 변호사 두엇의 생각으로 근거도 없는 여론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편을 든 적이 없을지 모르나, 기자실에서 작성한 당신의 기사는 명백히 편파적이다. 그것은 마치 사천 당가의 무형독인양 은밀하게 스며든다. 부은 자도 마신 자도 알지 못한다.  


검사 방을 나와서 재판정으로! 


  ‘공판중심주의’라는게 있다. 법관이 공판 심리에 의해서만 유죄의 ‘심증’을 형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서류만 보고 심판할 게 아니라, 법정에서 직접 보고 듣고 물어보면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당사자주의, 공판중심주의, 직접주의를 그 기본원칙으로 한다. 공판중심주의는 단지 공개된 법정에서의 심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시민에게 공개되고, 시민에 의해 감시되는 공판정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기소전부터 혐의사실이 ‘알려지고’, ‘전해지고’, 재판도 전에 검사가 ‘혐의사실 입증에 자신감을 보이는 모양새’고, ‘법조계의 중론이 혐의가 있다’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다. 

 대한민국 대법원이 2003년 3월 ‘새로운 형사재판’모델을 도입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공판중심주의였다. 그후 6개월간 무죄선고율이 전년 동기 대비 75%나 늘어났다.  

“피고인이 검사의 질문에 ‘예, 아니오’ 식으로만 대답하던 관행을 바꿔 본인의 주장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 보장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충실하도록 피고인 쪽의 증인 신청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사람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오지 않으면 수사기관에서 했던 진술의 증거능력을 엄격히 심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부터 9월까지 6개월 동안의 무죄 선고율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75% 정도 늘어났다."   


  한겨레신문은 기자실을 벗어나, 검사 방을 나와서 재판정으로 갈 수 있다. 검사 몇 명에게 전화를 돌리는 대신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고, 말한 이 없는 어디에선가 전해 듣는 대신 충분한 반대심문이 보장되는지, 엄격한 증거조사 절차가 따르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판결문을 공공데이터로 공개할 것을 촉구하고

, 수십 년간의 판결문 데이터를 분석해 판결의 모순, 징벌의 형평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전관예우 범죄의 혐의들을 찾아낼 수 있다. 검찰의 무죄 증거(exculpatory evidence) 제출을 의무화하는 입법을 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공판중심주의에 충실하다면 굳이 검사에게서 혐의사실을 하루라도 먼저 전해 듣기 위해 목을 맬 이유도 사라진다.  


 마감 시간과 지면 제약이라는 시대착오  


재판을 보도하고는 싶지만 마감시간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심리 초반 법정에 나오는 검찰 신청 증인은 검찰이 먼저 주신문을 하고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하는데, 중요한 재판일수록 검사의 신문이 길어져 막상 반대신문을 시작할 때는 기사 마감시간이 임박하거나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이러니 검사 신문이 끝나고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시작되면 기자들은 모두 자리를 뜬 다음이 되기가 쉽다. 여기서 또 한번 기자들의 편향 논란이 나오게 된다. ‘기자실에서 그렇게 검사들 기소장만 보도하더니 정작 재판정에 와서도 검사 신문 끝나니 다 나가버리네? 변호인 변론은 아예 들을 생각도 없구나.’ 이러다 보니 한 시민이 재판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해 그 과정을 전하는 동영상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검사의 신문 내용은 기자실에서부터 계속 들어와 익숙하지만, 변호인의 반대신문은 새로 듣는 내용들이라 이해하는데 품이 든다는 것도 있다. 게다가 선악이 드러나게 단순하게 쓰면 클릭율이 올라가지만, 다각도로 분석해서 길게 쓴다고 해서 클릭율이 노력만큼 나오지도 않는다는 현실도 있다. 포털은 오직 클릭율에만 상을 주기 때문이다.  


  두 제약이 둘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2021년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종이신문의 이용률은 8.9%다. 20대는 2.0%다. 그나마1주일에 한번이라도 보는가?에 대한 답이 그렇고, 매일 이용율은 0.8%로 떨어진다.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포털을 이용해서 뉴스를 본다는 비율이 84.5%, 온라인 동영상에서 뉴스 본다가 69.7%, 소셜미디어가 45.4%다. 4대 뉴스매체는 티비, 인터넷 포털,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그리고 메신저다. 신문, 잡지, 라디오는 끼지 못한다. 가장 신뢰하는 매체는 KBS, 네이버, MBC 순이고, 10위는 유튜브다. 한겨레는 10위에 들지 못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이신문의 결합열독율은 89.6%다. 종이신문을 포함해 스마트폰, PC 등 다양한 수단으로 신문 기사를 읽는 비율을 의미한다. 8.9%를 위해 89.6%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기회가 생긴다.

 인터넷에는 2가지가 없다. 하나는 마감시간이고, 또 하나는 지면의 제약이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사를 써도 된다. 89.6%의 독자는 인터넷에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분석기사를 쓰기에는 지면이 제한돼 있어요!도 자연스럽게 틀린 얘기가 된다. 인터넷에는 지면 제약이 없다. 흔히 ‘인터넷에서는 긴 글은 읽히지가 않는다’는 통념이 있다. 이것도 틀렸다. 

3천단어 이상의 긴 글이 짧은 글보다 무려 77.2%나 더 많이 읽히고 공유된다는 통계가 있다. 2017년10월부터2018년 10월까지 1년간 인터넷에 올라온 9억1천2백만 건의 글을 분석해 얻은 결론이다. 그러니 클릭율 걱정없이! 길고 충실하게 기사를 써도 된다. 내용이 좋기만 하다면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이 공유될 것이다. 

 

  20세기 폭스사의 회장이었던 대릴 자눅은 1946년 이렇게 말했다. "텔레비전은 처음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만든 상자를 보는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1927년 최초의 본격적인 유성 영화 <더 재즈 싱어>가 나오자 워너브라더스의 창업자였던 해리 워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 배우가 말하는걸 듣고 싶어한단 말이야”라고 했다. 인간은 새로운 미디어가 나오면 잘 적응하지 못한다. 


  한국에 상용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된건 1993년이지만, 한국의 신문들은 아직도 인터넷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웹은 텍스트, 그림, 동영상과 같은 다양한 정보들을 하이퍼텍스트(hypertext) 방식으로 연결해서 제공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문서 내부에 또 다른 문서로 가는 링크를 집어넣음으로써 웹상에 존재하는 정보들이 서로를 참조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말한다. 웹을 만드는 언어의 이름은 HTML(Hypertext Markup Language, 하이퍼텍스트 마크업 언어)다. 하이퍼텍스트로 웹 페이지를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언어다. 이렇게 작성한 문서는 HTTP(HyperText Transfer Protocol)를 이용해 누구나 쉽게 검색하고 접근할 수 있다. HTTP는 ‘하이퍼텍스트를 쉽게 전달하는 규약’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인터넷이 ‘하이퍼텍스트’다.  

 한국의 신문들은 기사에 좀체 링크를 넣지 않는다. 독자의 89.6%는 인터넷에 있지만, 여전히 종이신문만 만들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포털에서 외부 링크에 패널티를 매겨서 그렇기도 하다. 트래픽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면 포털의 가두리 장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매체들이 이상한 광고들을 링크로 마구 집어넣은 탓도 있다. 쌍방과실인 셈이다.


 기사의 근거가 되는 문서들을 링크로 빼곡히 채워넣을 수 있다면, ‘알려졌다’느니 ‘전해졌다’와 같은 허무한 글쓰기도 없앨 뿐더러 기사의 신뢰도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근거를 제시하는 글쓰기는 독자뿐 아니라 기자들에게도 큰 도움으로 돌아올게 분명하다.  

  
기자실을 벗어나 인터넷의 바다로  


 한겨레신문의 탄생과 역할을 주제로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한국 저널리즘과 언론민주화운동’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 모리 토모오미 세츠난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겨레신문은 ‘기자실을 공개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으나 ‘기자실을 폐지하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여기에 기자실 문제에 관한 한겨레신문의 한계가 있다. 한겨레신문도 기자실에 가입한 미디어의 일원이고, 기자실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자실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 될 수 없다” 한국 기자실의 원형인 일본 기자쿠라부의 문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리 교수로서는 한국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을 자임하는 한겨레신문이 기자실 폐지를 주장하지 않은 점이 매우 의아했을 것이다.


 한겨레는 기자실과 검사 방을 벗어나 재판정으로 나올 수 있다. 모든 판결문의 공개를 끌어낼 수 있고, 종이신문의 한계를 벗어나 인터넷의 대양으로 나올 수 있다. 모든 기사의 근거를 밝히고, 지면의 제약과 마감의 한계를 벗어나, 깊이 있고 충실한 기사를 길게 길게 쓸 수 있다. 그때 한겨레는 ‘기존 언론과 다른 역할, 다른 자세로 권력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을 기대하고 시민들이 만들어준 언론’으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겨레신문의 작은 위기요, 한국 사회의 큰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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