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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Dec 03. 2023

올해도 남의 생각을 모으기만 했다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처럼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는 나지만, 수집욕이 넘치는 분야가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빵빵 터지는 에피소드를 풀어주면 핸드폰 메모장을 켜고 “이거 적어도 돼? 나중에 써먹어도 돼?”라고 묻고, 트위터에 올라온 유용한 정보는 링크를 긁어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기’로 보내놓는다. 여행 가서 내 사진은 안 찍지만, 길 가다 위트 있는 간판을 만나면 확대까지 해 찍어둔다. 책을 읽다 좋아서 북다트로 표시해 둔 구절은 노션 독서노트에 발췌해 저장한다. 뉴스레터를 읽다가, 좋아하는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인터넷 세상을 헤매다 만나는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 듯한’ 모든 것들을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소중하게 모은다.


모으기만 한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명언. ‘Connect the dot.’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된다. 내가 부지런히 모으는 텍스트와 사진, 누군가의 문장들은 선의 재료가 될 것이다. 비상한 이들은 이 인풋들을 기록하는 순간만으로 뇌 속에 저장이 될지도 모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사진 기억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이큐 100 언저리의 평범한 나는 적어도 한 번은 더 들춰봐야 ‘그래, 이런 재료가 있었지’ 입력이 된다.  


그런데 나는 왜 모으기만 하면 ’땡‘인 것처럼 등을 돌려버리는 걸까?


여기 두 개의 냉장고가 있다고 치자. 한 냉장고에는 산지 직송으로 올라온 신선한 유기농 식재료들이 가득하다. 내가 하나하나 발품을 팔아 사모은 것들이다. 그리고 다른 냉장고에는 탕후루와 마라 엽떡, 불닭볶음면 등의 음식들이 대기 중이다. 요리할 필요도 없이 즉각 제공된다. 유기농 식재료들을 보면 내 삶이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어 뿌듯하지만, 마라 엽떡은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혀뿌리에 침부터 고인다. ‘오늘은 정말 건강한 음식을 해 먹어야지!‘했던 다짐은 자극적인 단맛과 매운맛 앞에서 물에 적신 솜사탕처럼 쉽게 사라지고 만다.


인풋을 쌓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좋은 레퍼런스들이 보일 때마다 열심히 모으지만, 실상 내 눈과 마음이 더 오래 머무는 것은 영양가 없는 30초짜리 쇼츠인 것이다. 쉴 새 없이 넘어가는 영상과 비슷비슷한 내용이지만 지독하게 유혹적인 인스타그램 돋보기, 하루종일 내려도 질리지 않는 트위터 타임라인 안에 박혀있느라 정작 내가 엄선한 콘텐츠들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렇게 포화상태에 빠진 뇌는 진득하게 앉아서 뭘 읽거나 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더더욱 휘발성이 강한 자극만을 추구하게 된다.


남의 생각을 모으는 이유는 결국 내 생각을 더 깊게, 더 넓게 만들기 위해서다.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처럼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고, 그때의 내가 코멘트해 두었던 생각을 지금의 내 생각과 비교해 보고, ‘어떻게 써먹어볼까’ 머릿속에서 한번 굴려도 보는 시간이, 우리에게 정말 없는 걸까?


물건도, 영감도 써먹어야 한다. 수집만 하는 ‘영감 호더’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카페에 앉아 그동안 발췌해 둔 기록들 몇 가지를 건져올려 읽어 보았다. 어찌나 새롭던지. 하지만 문제의식만은 새롭지가 않아서, 3년 전쯤 존리 대표의 새해 루틴에 대한 인터뷰에서 이런 구절을 적어뒀더라. ‘생각을 하지 않으면 쓸려나가 버린다. 적어도 일주일에 1시간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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