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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Aug 07. 2016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편지 5

오전 내내 날씨 맑다가 중간에 비.


여기는 고도 3800m 지점으로 7000m가 넘는 마차푸차레 등반을 위한 베이스캠프 장소이다. 고도가 3000m가 넘어가면서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지에 적응하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지금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도 벌써 2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열이 오른다.  최종 목적지까지 330m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올라가는 것이 그간의 여정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고산병이라는 문제는 거머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거머리는 정말 하찮은 문제에 불과했으나 고산병은 다르다. 이 문제로 하여금 내가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정된다. 그래서 오는 길 내내 천천히 걸었다. 물론 내 느린 걸음 때문에 일행을 몇 번이나 붙잡아두었다. 너무 미안한 일인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행의 눈초리 때문에 일행의 속도에 맞춰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면, 아마 나는 더 심한 고산증세에 시달려 결국 중간에 산행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나는 틀림없이 내 일행을 원망하고 이들 탓을 했겠지. 고산증세가 와서 이곳까지 오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내 자신이 아니라 일행들에게서 찾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너를 앞질러간 그들이 너를 대신해 오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좀 더 이기적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과에 대해 그들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남들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니가 내딛어야 할 그 앞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맞다. 내가 어리석었다. 겉으로 남을 위하는 척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자기 기만일 뿐이다. 어정쩡한 희생, 그리고 희생이라는 미명 하에 숨겨진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

3000m 이상의 높이에 올라오니 그동안 내가 보지 못 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철저한 경험주의 정신이 생겨났다. 올라와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가 이 모든 것을 글로 풀어낸다 해도, 아무리 뛰어난 화가가 이 풍경을 그림으로 옮겨낸다 해도, 내가 여러 장의 사진을 가지고 이를 설명해내려고 해도 직접 올라와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가 없다. 앞으로 내가 하려는 많은 일들이 이와 비슷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해보지 않고서 알 수 없는 것이라면 너무 두려워하거나 겁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괜한 두려움과 공포로 시작도 전에 포기해버린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높이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과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알지 못할 것이다.
처음 네팔로 떠나오기 전, 겁먹고 두려워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경험해봐야 안다'
참 단순한 이치이지만 뼛 속 깊이 깨닫기까지 참 오래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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