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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12. 2017

소비하는 삶의 결말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사기 위해 산다

 12월은 그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몰아서 만나는 달이다. 회사 일로 주말에도 출근을 밥 먹듯이 했던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집 앞에서 만났다. 반년 만에 만난 우리는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우동과 돈까스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직과 퇴사를 연이어 경험한 친구는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일주일 정도 되는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늦잠도 자고 그동안 일하느라 놓쳤던 영화도 보면서 기간제 백수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며 친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행복함을 늘어놓았다. 다음 주면 다시 출퇴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짓궂게 상기시켜주자 그는 천장을 보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안 그래도 새 직장에 출근하는 기념으로 옷을 샀다며 쇼핑백에서 셔츠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대형마트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된 쇼핑백에서 단정한 옷깃의 긴팔 셔츠가 색깔 별로 쏟아져 나왔다. 연말 세일 기간의 마법 같은 할인의 힘으로 셔츠 가격은 한 벌 당 만원이었다. 옷 입는 일에 많은 애정과 비용을 쏟아붓던 친구의 변화가 의외였다. 웬일로 저렴한 옷을 샀냐는 물음에 친구는 더 이상 옷 사는데 돈을 많이 쓰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키와 체구가 조금 작은 편이었기에 친구는 남성다움을 강조할 수 있는 단정한 클래식 패션을 주로 입었었다. 학생 때는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월급을 모아 영국산 수제구두나 이탈리아제 정장을 사 입던 것을 기억한다. 큰돈 들어갈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레 말을 건넸더니 지갑 사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옷 입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친구는 옷 입는 즐거움을 그만두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줬다. 
  
 회계 파트에서 일했던 친구는 업무 특성상 주말 출근이나 야근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직장 내부의 감사나 분기 별로 세입세출을 정산할 때면 회사에서 밤낮없이 먹고 자고 일하는 삶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사용하지 않은 연차가 차곡차곡 쌓여 휴가를 일 년에 한 번 해외여행을 가는데 썼다.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같이 주로 유럽을 여행했다며 친구는 내게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나 친구가 보여준 사진에는 도착해서 공항에서 찍은 사진과 쇼핑몰과 판매점들이 있는 거리를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흔한 관광지에서의 인증샷이나 아름다운 유럽의 풍경 같은 것들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친구는 여행지에서 한 일이라고는 아울렛을 찾아다닌 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서는 출시된 지 2년이 넘은 정장을 모아서 판매하는 아울렛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고 영국 런던에서는 수제 구두를 사기 위해 차를 렌트해서 공방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품질 좋은 일본산 가죽제품을 세일 기간에 구입하려고 반차를 쓰고 도쿄를 다녀온 적도 있다는 말을 하며 친구는 멋쩍게 웃었다. 여행기간 내내 발품을 팔아가며 산 옷과 구두 셔츠 같은 것들을 집으로 돌아와 옷장과 신발장에 진열해 놓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는 친구. 휴가와 맞바꿔 장만한 옷을 입고 상여금을 털어 산 구두를 신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는 데서 나는 친구의 세계가 나와 많이 다름을 실감했다. 그렇게 유럽으로 쇼핑여행을 계속하던 그에게 대학 후배가 유럽 여행에 대한 조언을 구한 일이 있었다. 
  
 밀라노의 가볼 만한 곳을 물어보는 후배에게 친구는 아울렛을 돌아다니느라 가본 곳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후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선배. 선배는 여행을 가서 여행은 하나도 안 했네요.’ 란 대답을 친구에게 돌려줬다. 그때 친구는 처음으로 그동안 자신이 떠났던 휴가를 되돌아봤다고 했다. 가볼 만한 관광지나 유적지를 찾아보는 대신 유명 브랜드의 세일 제품을 판매하는 아울렛의 위치를 검색했고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핫플레이스 대신 현지의 세일 기간을 체크했다. 여행지의 추억을 대신해서 옷장에 걸려있는 최고급 재킷들. 몇 달간 초과근무를 밥먹듯해가며 만든 휴가와 맞바꾼 값비싼 가죽구두들. 
  
 옷장에 걸린 정장들은 말끔하게 다림질되어있고 신발장의 수제 구두들은 가죽 크림을 발라 광이 났다. 친구는 그 앞에서 명품들이 늘어갈수록 본인의 삶은 초라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친구는 그동안 모았던 옷과 구두를 모두 처분하기로 결심했고 끝내 실행에 옮겼다. 사진을 찍어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온라인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전화로 문자와 메시지가 쏟아졌다.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세계를 살고 있을지 모르는 그들에게 친구는 애지중지 모아 온 인생 컬렉션을 전부 양도했다. 그 날 이후로 친구는 바지나 셔츠 구두까지 입는 것들은 전부 대형마트의 세일 코너에서 구입하고 있다. 오늘 입고 온 셔츠와 니트 코트 그리고 신발까지 합해도 2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는 친구는 예전보다 좀 더 밝아 보였다. 
  
 소비를 통해 느끼는 기쁨에 만족은 존재할 수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갖고 싶은 것들은 더 늘어나기 마련이다. 사치품과 명품은 제품으로서의 기능성이 아닌 심미성과 소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더 크다. 필요는 기능을 통해 만족될 수 있지만 소유의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수집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시간이 지나 삶의 주도권마저 빼앗길 수 있다. 살기 위해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물건을 사기 위해 삶을 사는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꾸미는 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큰 즐거움과 만족감을 준다. 여자의 아름다움과 남자의 멋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다. 다만 외면의 아름다움은 내면의 건강함과 균형을 맞춰야 제대로 드러난다. 공장에서 찍어낸 저렴한 가격의 셔츠와 기성복을 입었지만 친구는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멋은 옷이 아니라 건강한 삶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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