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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는 건

깨고 싶지 않은 꿈, 지금

by 제이조이

작가님, 뜨거웠던 여름과 대지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완연한 가을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예전에 신경 썼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무뎌진 것 같기도 하지만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날씨와 계절에 관한 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하원시간 즈음의 날씨와 온도를 체크하고, 주말에 혹시 비가 오진 않을지 모니터링하며 아이와 함께 할만한 것들을 그려보는 건 매일 아침 모든 엄마들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일어나는 연산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지금은 제법 능숙한 엄마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생아 때 초보 엄마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캡틴 급이지요.


전 사실 한동안은 아이를 낳고 엄마노릇을 하면서도 어리둥절했습니다. 신생아 육아땐 적성에도 안 맞을뿐더러 체질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달고 살았죠. 수면부족과 널뛰는 호르몬 탓도 있긴 했겠지만 그것보다도 엄마 모드로의 전환이 마음처럼 단박에 되지 않았고 그게 참 어려웠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2주 정도 되었던 주말에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낮잠을 자며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꿈과 현실의 중간쯤에서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는데 어떻게든 꿈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엄마가 아니었고, 이곳저곳 자유롭게 여행하던 이전의 일상 속에 있었거든요. 정말이지 그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서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연장해보려고 했지만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지요. 그 세계와 제가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분리되는 것을 느끼면서요.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빛이 살짝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방에서 몸을 웅크린 상태로 눈을 꼭 감고 거실에서 남편이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났던 그날의 오후는 아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만 이렇게 요란하게 엄마가 되는 건지 그게 참 궁금했던 시기였습니다.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전남친이 있었습니다.


“넌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건 다 개뻥이야. 네가 실제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은 너 자신일 뿐이니까. 너는 그런 사람이야.”


남이 하는 말에 타격을 거의 안 받는 편인데 이상하게 저 말만큼은 문득문득 생각나더라고요. 처음 엄마가 되고 제 중심에 아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내어주는 그 과정이 벅차고 힘들었을 때 불현듯 저 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땐 그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과,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처럼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했었네요.


작가님께서는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미술놀이를 단우와 주로 하신다고 하셨죠. 저는 요즘 미엘과 뭘 주로 하나 생각해 봤는데, 음..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거리고 사랑의 말을 나누는걸 가장 즐겨하는 것 같습니다. 마음껏 부비적거리기 위해서 집에 오면 화장부터 지우고, 로션도 아이가 쓰는 로션을 함께 바릅니다. 특히 아침인사를 나눌 때와 밤에 잠들기 전, 침대에서 함께 뒹굴거리며 오늘 하루 종일 한 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서로 끌어안고 ‘사랑해, 보고 싶었어, 오늘도 수고했어, 기다렸어’ 등의 말을 끊임없이 나눕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해 주는 아이도 사랑스럽지만, 아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내가 이런 사람일 수 있구나’ 하는 마음이랄까요. 그렇게 중심을 내어줬음에도 제가 사랑했던 제 자신 또한 여전히 건재한다는 사실도 함께요.


신생아 육아 시절이었다면 작가님의 지난 글에서 ‘영끌 육아’ 부분에 가장 많은 공감을 했을 테지만 (그땐 영끌을 넘어 영혼까지 탈탈 털은 육아를 했으니까요) 지금의 저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다시 단우에게로 흐른다’는 작가님의 문장에 자꾸만 머무르게 됩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된 것도, 엄마로서의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뭐든 간에 제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는 건 그토록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언제까지 아이가 제 부비적거림을 받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아 좀 그만해” 하며 제 품을 밀어내려나요? 미엘의 세상이 온통 엄마인 지금, 넘치고 흐를 정도로 마음껏 표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것 같네요.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밀린 독서와 글쓰기지만, 아마 작가님도 저도 조그만 사람의 시중을 들며 기차 그림을 그리고 있을 확률이 커 보입니다. 하하. 모쪼록 즐거운 주말을 기원합니다.



9월의 끝자락에서

자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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