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Ji Youn Mar 16. 2017

누군가의 딸이었던 나에게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독립서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독립서점 방문 계획만을 정리해놓은 스케줄러를 따로 만들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 


직장인 시절, 퇴근길이나 주말에 대형 서점에 들러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라 집으로 향하던, 그 잔잔하면서도 평온한 느낌이 아직까지도 짠하게 남아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책들 속에 앉아 있노라면 왠지 고상한 지식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대형 서점의 단점을 꼽는다면 내 선택에 의해 책을 구입하기보다는, 이미 큐레이션 된 책을 구입하게 되기 쉽다는 점일 것이다. 즉, 베스트셀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을 주로 구매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어렵게 확보한 잠깐의 짬이 생긴다면 이왕 읽을 책, 누구와 얘기하더라도 알 수 있는 베스트셀러는 되어야 그래도 책 읽었다는 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읽는 것이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라는 행위에 ‘실용적’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자니, 잠시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내 취향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어찌 보면 현실회피용이기도 하다. 선택하는 책의 종류에 따라 잠시 다른 세계에 살다 오기도 하고, 지금까지 몰랐던 지식을 쌓기도 한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에게서 지혜를 빌리기도 한다. 읽는 책이 무엇이든 간에, 책 읽는 행위 자체는 내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기에 존중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한데, 마치 한 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인 것 마냥 책을 읽는 행동에도 실용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언짢다. 독서가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될 수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서점의 선전은 유쾌했다. 옆의 사람과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의무감에 드라마를 시청하듯 베스트셀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만을 위한, 나의 관심사만 고려한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넓어졌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독립서점을 방문하기로 한 날은 집을 나설 때부터 설레었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복층의 넓은 북카페였다. 내가 상상하던 독립서점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대형서점을 압축해놓은 듯한 느낌이기도 했으나 색다른 공간임에는 틀림없었다.


주문했던 커피 한 잔을 들고 찬찬히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대형서점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책들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점이 신선했다. 그렇게 십여 분을 서 있었을까. 내 시간을 갖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 책을 보려 하였으나 다시 엄마 마인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딸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찾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어렸을 때, 20대였을 때, 한창 젊었을 때 읽었던 부류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위, 딸들아 이렇게 살아라, 나는 못했던 것 너는 이루어라,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으며 살아라,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 등의 주제를 다룬 책 말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만 해야 했던 10대 시절에는 꿈이 무엇인지 알 기회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고 그리고 사회에 나오게 된 이후에야 이런 ‘딸을 위한 책들’을 일부러 찾았고 마음에 새겼다.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고, 온전히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이런 책을 접했던 시기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즉, 내 인생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시기가 10년 남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된 이후부터는, 나에게 주어졌던 그 시간은 마치 빼앗기거나 잊혀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나는 할 수 없으니 딸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해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많을 텐데도, 지금, 내가 놓치고 산 것을 너는 이루며 살라는 말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사랑스럽고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딸이었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나 역시 소중한 아이였다. 그 아이가 컸다고, 소중했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딸이었던 만큼, 내 아이처럼 큰 사랑 듬뿍 받으면서 살아온 존재다.


내가 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곧, 누군가의 딸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 내가 들었던 말일 것이다. 


당시에는 그 말을 듣고 때로는 가슴이 벅차기도 했으며, 때로는 답을 몰라 방황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 현실을 알게 되었고 철이 들었다고 혹은 어른이 되었다고 그 희망은 내 것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꿈을 아이에게 혹시 미루는 것은 아닐까.


꿈, 접지 말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그랬다고,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런다고,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기에도 벅차다며 언제 찾아볼지 모를 창고 속으로 꿈을 밀어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이 보는 책을 똑같이 보는 시대도 지나갔다. 개성에 따라 취향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 세상이다. 그것도 당당하게 말이다.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나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의 딸이었던 나에게, 소녀 시절 가졌던 꿈을 지금도 당당하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시절의 나처럼 살자고.

매거진의 이전글 소소한 그릇 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