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채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
여행은 가끔 아주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다.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영상을 하나 클릭했다. 평소 차(茶) 관련 영상을 종종 보다 보니 뜬 걸지도 모르겠다. '오리엔티 정상훈' 채널의 “중국 도자기는 왜 그렇게 비쌀까?”라는 영상. 그 안에서 경덕진 도자대학 유시형 박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평소 도자기를 좋아하던 터라 더 호기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경덕진을 걷고 싶어졌다.
예전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일일 투어를 했던 경험이 생각났다.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첫날은 도자기를 잘 아는 분과 함께라면, 여행동안 눈에 담기는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유튜버분께 연락을 드렸고, 다행히도 유시형 박사님과 연결되어 경덕진에서의 일일 투어를 예약할 수 있었다.
기차역에 도착하자 박사님이 차로 마중 나와 주셨다. 한국에서 일반 자유여행으로 경덕진에 오는 경우는 드물다며, 박사님은 조금 놀라워하셨고 반가워하셨다.
그렇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건네받은 건 작은 찻잔 두 개. 어느 해는 흙의 질이 특히 좋아 그 시기의 도자기가 특별해진다며, 그 해의 찻잔을 모으고 계시다가 가이드할 때 선물로 주신다고 한다.
차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왜 중국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게 되었는지 물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차이점 하나. 한국은 한 사람이 흙을 빚고 굽기까지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도예(陶藝)’ 중심의 문화라면, 중국은 각 공정이 정밀하게 나뉘어 있고, 그중에서도 형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도자 공예(陶瓷工藝)’가 유독 발달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요(御窯) 박물관에 도착했다. 명(明)·청(清) 시대 황실 자기, 즉 어요(御窯)를 제작하던 유적지에 세워진 박물관과 민속촌처럼 꾸며진 곳으로 가마에서 영감을 받은 건물들이 포토스폿으로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오후 늦게 도착했기에, 도예가 분들이 퇴근하기 전 작업 모습을 보기 위해 서둘러 입장했다. 여전히 실제로 쓰이는 가마가 남아 있었고, 붓질을 이어가던 도예가들의 손끝은 조용한 집중으로 가득했다.
가마 방식에 따른 온도차, 유약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감의 깊이까지. 하나하나 설명을 들으며 빠져들었다. 박물관에서 들은 노란색은 한때 황제만이 쓸 수 있었던 색이라는 이야기에선 도자기를 넘어 시대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눈앞의 유물들이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 권위와 미감이 겹쳐 쌓인 기록처럼 느껴졌다.
박물관 외에도 여러 가게와 전시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그중 선시차방(鮮時茶坊, Xiānshí cháfáng)에서는 감각적인 도자기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청화백자 위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듯한 ‘칠링 바스켓’이 특히 인상 깊었다.
나중에 샤오홍슈에서 ‘투페이지취(偷飞机去, Tōu fēijī qù)’라는 디자인 스튜디오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부피와 파손이 걱정돼 내려놓았지만, 지금도 '그때 사 올 걸' 하고 떠오르는 마음에 드는 도자기였다.
잠시 쉬어간 카페에서는 박사님이 커피를 사주셨다. 추천받은 시그니처 메뉴는 향이 깊었고, 예쁜 카페에 앉아 커피타임을 가지니 오전부터 이어진 기차 이동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해가 지자 공원에 하나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둥근 등이 은은한 빛을 내며 거리를 감쌌고, 사람들은 그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바람도 조용하고 부드러워 서두를 이유가 없는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는 싼바오(三宝, Sānbǎo) 예술촌 인근의 Fantianli(梵田里, Fàntiánlǐ)라는 식당에서 했다. 원래 투어는 저녁 식사 전까지였지만, 저녁을 대접하는 대신 도예 거리까지 조금 더 동행해 주시기로 했다.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고, 함께 찾아간 그 공간은 기대 이상이었다. 1층은 식당, 2층은 다실로 운영되고 있었고,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정갈한 공간은 서울의 고급 카페들을 떠오르게 했다. 음식들도 중국 향신료에 익숙하지 않은 입맛에도 편안하게 스며드는 맛이었다.
식사 후, 함께 도예 거리의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각 가게마다 전혀 다른 취향과 감각이 있었고, 무엇이 특별한지, 어떤 시대를 재현한 것인지 박사님의 설명이 더해지자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혼자였다면 들어가기 망설여졌을 공간들도, 안내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어떤 가게에서는 ‘1급 요장(窯場) -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 등급의 의미를 알려주셨다. 단순히 그릇 하나를 보는 눈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사님의 지인 작가들이 만든 접시와 말 형태의 소품들도 인상 깊었다.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젊은 작가들의 감각 속에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또 다른 상점에서는 조용한 조명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민트색 자기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티파티앤코의 보석 상자를 떠올리게 하던 그 자기를 조심스럽게 들어보았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살며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거리, 그날은 그 사실을 조용히 실감한 날이기도 했다.
경덕진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또 하나의 취향과 연결된 기억으로 남았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여행 첫날부터 유난히 눈에 남는 고급 도자기들을 봐버렸다는 점이다. 이후 우리끼리 다니면서 프리마켓이나 아마추어 작가 도자기들을 볼 때,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고, 웬만한 작품에는 발걸음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처음 본 것이 너무 강렬하면, 그다음이 조금 억울해지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