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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un 21. 2021

당신이 간 그곳이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책이 있다. 2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당한 유일한 영국 영토, 건지  사람들의 이야기다. 런던에 사는 작가 줄리엣 애슈턴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독서 모임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면서 그곳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고  특별한 모임 사람들을 만나러 섬으로 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상한 이름의 북클럽은 가축을 몰수당해 감자로 끼니를 이어 가던 사람들이 독일군 몰래 돼지구이 파티를   집으로 돌아가다가 통금 위반으로 검문에 걸렸고, 문학회 모임을  것뿐이라는 핑계를 대고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대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시대는 암울했고, 5년이나 이어진 독일군의 통치는 사람들의 영혼을 갉아먹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이상한 북클럽이 생긴 이후, “술에 찌든 정신과 의사, 말더듬이 돼지치기, 그리고 해맑은 푼수데기들로 구성된  못난 북클럽 모임은 서로를 보듬는 놀라운 역할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책을 읽으며 변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감동이다. 건지 섬을 찾은 줄리엣이 사랑도 찾고 작가로서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 또한 즐겁다. 돼지고기를 함께 먹었던 그날 밤 일이 자신들의 인생을 어떤 곳으로 데려갈지 몰랐던 사람들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따뜻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놀라운 작품이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작품은 결국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타깝게도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읽고 나면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 한프와 런던의 <마크스> 서점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글을 담은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떠올리게 된다. 전쟁 직후 온갖 물자가 부족했던 런던의 서점으로 치즈와 고기, 달걀과 통조림을 보내는 작가, 그런 작가를 위해 작가가 목말라하는 책들을 성심껏 구해 보내 주는 서점 사람들. 읽는 내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책이다.      


“이 아름다운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술과 담뱃재로 더럽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저 같은 사람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고상한 책입니다.”(채링크로스 84번지, 51)     


책이란 이런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단 한 번 얼굴도 보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게 되고,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고 싶어서 동분서주하며, 그 사람과 그 가족이 달걀이 없어 고생하지는 않나 마음을 쓰게 만든다. 책이 뭐라고. 책방이 뭐라고.      


번역가, 편집자가 함께 모인 독서 모임에 한 달에 한 번, 10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다. 모인 사람들이 서울, 경기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사는지라 대부분 교통편이 좋은 광화문에서 만나곤 했다. 모임 인원도 많고 해서 같은 장소에서 매번 모이기 힘들었고, 장소 특성상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만나는 일이 많았다. 달마다 읽고 싶은 책 투표를 하고, 모임 전까지 간단한 리뷰를 밴드에 올리고 있는데 모임 날이 되면 ‘아, 또 한 달이 이렇게 훌쩍 갔네.’ 실감하곤 한다. 다정하고 따뜻한 모임이었지만 좀 더 다른 느낌의 독서 모임이 필요했다.


기존에 내가 하던 독서 모임에는 아이가 없는 사람, 아이가 고등학생이거나 중학생인 사람, 혹은 초등학생인 사람들이어서 내가 아이와 읽고 있는 그림책이나 내가 만드는 어린이책 이야기를 같이 나누기에는 관심사가 많이 달랐다. 그러던 차에, 고양시에서 독서 동아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쇼핑몰로 자리를 옮긴 <미스터버티고> 책방에 부탁해 어린이책을 함께 읽을 사람들과 모임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집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과 동네 모임을 갖고 싶었던 내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1년 가까이, 제법 충실하게 모임이 진행되었다.      


“독서는 개인적 경험이고 독서 모임은 사회적 경험이에요. 독서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면 독서 모임에는 혼자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읽을 확률이 더 높죠. 독서 모임을 통해 이전에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타인의 생각이나 자신의 무관심 영역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어요.”(위클리공감, 이근화, 2018년 3월 11일)     


사람을 성장하고 변하게 만드는 만남, 바로 독서 모임의 매력이다.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만난 동생들 몇, 그리고 친구들, 책방을 통해 찾아온 사람들까지 열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이 모임을 거쳐 갔고 고정 인원 7명이 3주에 한 번씩 모여 어린이책을 읽고 그림책 낭독을 이어 나갔다.

그 모임에 아름다운 사람, 이수연 씨가 있었다. 나랑 나이가 같아서 처음부터 마음이 갔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둘이 산다 했지. 아이들 논술을 가르치다가 지금은 쉬고 있는데, 그림책에 관심이 많지만 혼자 보는 건 어려워서 모임에 오게 됐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되는 거리를 멀다 하지 않고, 꾸준히 나와 주었고, 나와서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잘해 주었으며, 꺼내 놓기 힘든 이야기를 확 풀어 놓기도 해서 고마웠던 친구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점이 많아 반가웠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는 독서 모임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터였다. 봄에 시작한 모임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건너면서 다들 가까워지고, 편안해질 무렵이었다. 용인으로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됐다고, 그래도 이 모임 마칠 때까지는 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안타깝고 아쉬웠다.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안다. 세상을 알 만큼 알게 됐고, 사람들이 얼마나 계산적인지 깨달았으며, 좋은 친구를 만나는 건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독서 모임에서 만난 우리들은 책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서 조금 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고, 만날 때마다 오래 만나 사귄 친구처럼 책 이야기를 나눴고, 나이 들어 편찮으신 부모님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된 것이다. 용인으로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지셨는데, 고향인 용인으로 가고 싶어하셔서 이사를 가는 것이라 했다. 친구분도 많고, 그곳이 지내기 편하실 거라고.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수연 씨가 그 일을 혼자 맡게 되는 것인가 해서 친구로서 속상했고 더 많은 일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웠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모임 때 꼭 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으나, 이사에 아버지 병환에 자꾸 오지 못할 이유가 생겼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고, 독서 모임도 마무리를 하게 됐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연결이 되지 않았고, 어느 늦은 밤, 전화기에 수연 씨 이름이 떠서 얼른 받으니 목소리보다 먼저 힘겨운 신음 소리가 건너왔다.


“잘... 지내...지요?”


긴 호흡으로 건네오는 인사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실은 말기암이었다고, 무어라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아버지 핑계를 댔다고 했다. 그나마 말하기가 힘들다며 길게 통화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다. 수연 씨가 있다는 요양원으로 책과 편지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힘내라는 말만큼 무용한 말도 없다. 그래도 힘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시 봄이 왔고, 수연 씨 언니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제 편안해졌다고. 동생이 좋아하던 모임이어서 연락을 하는 거라 했다. 아, 이런 이별도 있구나. 때는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이 최대치에 이르러 있었고, 일곱 살 아이와 살고 있는 나는 문밖으로 한 발짝 나서는 일 자체가 공포였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수연 씨를 보냈다.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던 보르헤스의 말대로, 수연 씨가 가 있는 그곳이 책으로 가득한 곳이기를 바란다. 꼭 그럴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와 똑같은 나이에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좋은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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