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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an 08. 2023

불행을 이야기할 용기

 모두가 병든 밤, 누구도 아프지 않기를 1

“어두운 날이면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을 걷다가 잠시 쉬다가 하늘이 없는 어디쯤에 가서 하얀 꽃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_ 허수경, <가기 전에 쓰는 글들> 中     

아버지를 모시러 서울역에 가던 지난 월요일은 길이 많이 막혔다. 여유를 두고 출발했는데도 차는 속절없이 도로에 매여 있었고, 그날따라 핸드폰은 쉴새없이  업무용 메시지를 뱉어 냈다. 교통체증 때문에 초조해지자 울고 싶어졌고, 눈시울은 뜨거워져도 미룰 수 없는 일들은 “까똑 까똑” 영혼을 두드렸다. 지난 석 달간 내게 일어난 일상의 극심한 지각변동들이 그 순간 나를 뒤흔들었던 모양이다. 

     

4월 말, 우리집에 일주일 머물렀던 엄마는 두 계절 전에 비해 더 많이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밥상 앞에 앉아도 입을 꼭 다물고 먹으려 하지 않았다. 고구마나 체리는 반가워하셨지만 밥이나 고기는 도리질을 했다. 달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가방에 옷을 주섬주섬 싸고는 집에 가겠다 나서곤 했다. 볼일 보러 들어가선 화장실에 속옷을 벗어 두고 나오시기도 했고, 식사하시라 부르면 잠깐 막내딸을 잊고 “예” 대답하기도 하셨다. 코로나로 자주 뵙지 못했던 시간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도 엄마는 고양이 도토리랑 장난도 치면서 많이 웃었고, 호수공원을 걸으면서 참 좋구나, 감탄도 하시며 지금 현재의 시간을 붙들고 계셔 주셨다, 감사하게도.      


엄마가 대구로 내려가시고 집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화정에서 지내던 시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어머니와 지내던 시동생이 재택근무가 불가능해진 상황도 있었지만, 시어머니 역시 코로나 이후 고립된 생활이 지속되면서 급격히 자신을 잃고 계셨다. 급기야 혼자 있던 어느날 아침, 집을 나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겼고 천만다행, 버스정류장에 혼자 우두커니 있는 어머닐 이상하게 본 동네 분(진짜 이런 의인들, 너무 소중한 존재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이 경찰에 연락해 주셔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어머니가 아파트 이름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상태시란 것도, 집에 없는 아들을 찾아 무작정 버스를 타려 할 만큼 인지력에 문제가 생겼단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다. 주말마다 가서 저녁을 함께 먹었고, 남편은 어머니 옆에서 토요일 밤을 보내고 오곤 했으니 무심했다 할 순 없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손 쓸 새 없이 나빠져 버릴 수 있는지.. 놀랍고 황망했다.      


그날로 짐을 옮겨 온 어머니와 4년 만에 다시 함께 생활하게 됐다. 결혼해 아이를 낳기까지 5년, 그리고 그 아이가 4살이 되었을 때 분가를 했으니 꽤 오랜 시간 함께 보낸 사이임에도 역시, 시어머니와 일상을 함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인지 장애를 겪는 81세 시어머니라면 더. 


완두콩 껍질을 벗기는 내 옆에 와 도와주시려 하다가는 “이거, 먹어도 되는 거지?” 하시며 말릴 새도 없이 날콩을 입에 쏙 넣으시는가 하면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오겠다 하면(식사 준비 다 해 놓고, 남편도 돌아와 있는 상태) “밥은?”이라며 눈을 사납게 뜨시기도 했고, 마늘을 까는 내 옆에 오셔서는 기어코 손톱으로 마늘마다 생채기를 내놓으시기도 하고, 변기에다 손을 씻으시는가 하면, 30초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려 하셨다. 금방 화장실 다녀오셨다 말씀드리면 “내가 언제?”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어머니를 두고 5분도 집을 비우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버지의 대장암 4기 판정 소식을 들었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닌 끝에 세브란스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했다. 병원 앞에 원룸을 얻고, 항암 받으시는 동안 큰언니가 함께 있기로 했다. 신촌 방에 둘 부엌살림이랑 잡다한 물건들을 내려놓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를 우리집에 모시지 못하고 좁은 방에서 지내시게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속상하던지,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자꾸만 불뚝심이 솟았다.      


항암 주사를 맞기 위해 아버지는 케모포트를 넣었고, 항암과 항암 사이 대구에서 올라오는 언니와 아버지를 맞으러 서울역과 신촌, 일산을 수도 없이 오가기 시작했다. 새벽밥을 해 먹고 나서는 길은 때론 시렸고 아렸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다행이다 싶은 길이기도 했다. 힘드실 텐데 씩씩하게 치료를 결정해 주신 아부지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행히 항암 부작용이 크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황감했다.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긴 여름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는 발바닥에 생기는 검버섯과 터져 나오는 난데없는 딸꾹질, 시도 때도 없는 긴 복통과 함께 힘겹게 힘겹게 시간을 버티고 계셨다.      


이 모든 일이 몇 달 사이에 다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놀랍고, 이 모든 일 앞에도 어찌저찌 제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애잔하고 안쓰러우면서도 간간이 웃음 나는 순간들이 있어 또 웃으며 시간을 보낸다. 대구 집에 같이 계실 때는 엄마가 자꾸 따라다녀 귀찮다시더니, 신촌에 머무시는 동안엔 그런 엄마가 걱정된다시며 아침저녁으로 영상통화를 하게 해 달라시는 우리 아부지. 전화기 너머 아부지를 보시고는 수줍어하시는 엄마도 낯설다. 귀엽다.      


아버지는 오늘 아침, 사흘 동안 맞은 두 번째 항암 주사를 뺐다. 8시에 주사를 빼고, 이른 아침의 연대 캠퍼스를 걸으며 언니랑 나는 아부지 옆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첫 번째 주사 때 약간의 미열과 딸꾹질 말고는 큰 부작용 없이 잘 넘기셨고, 2차 항암 직전에 한 혈액 검사 결과도 다행히 괜찮은데다, 아부지 표현대로라면 “상당히 좋아진 것 같”은 상태이니 한껏 기분이 좋다. 그런 상태로 오후에는 이천 큰오빠네 집으로 가셨다.      

3차까지 3주, 그리고 2주 뒤 다시 4차, 검사 후 항암 지속 여부 결정. 아직도 남은 일이 많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까지 마치고 나면 한시름 돌리겠지. 남은 일은 남은 일대로,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우리를 흔들거나 단단하게 하거나 혹은 무심해지게도 하면서 흘러가리라. 가끔은 지난 월요일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아프기도 하겠다. 이렇게나마 내 곁에 있어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 그것만 잊지 않으려 한다.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속에 이는 감정의 소용돌이도 잦아들 거라, 그렇게 믿으며.      


- 2022년 7월 15일, 두 번째 항암 주사를 마친 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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