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귀재, X를 상대하는 법
알파벳 스물네 번째 글자.
X.
“X는 어떻게 읽어요?”
영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듣고 콧방귀를 뀔 게 뻔하다.
‘이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날 뭐로 보고?’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답하겠지.
“‘엑스’잖아요. 당·연·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X는 보기보다 훨씬 더 예민한 녀석이다.
A부터 Z까지 총 26개의 알파벳 중 ‘단어의 첫 글자로 가장 덜 사용되는 알파벳'이 바로 X다.
오늘의 TMI.
반대로, 첫 글자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알파벳은 S,
순서와 상관없이 영어 단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알파벳은 E,
가장 덜 사용되는 알파벳은 Z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X로 시작하는 단어는 고작 436개에 불과하다. Z나 Q 역시 사용 빈도가 낮지만,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약 1,000개씩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X의 존재감이 얼마나 희미한지 짐작할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단어의 첫 글자로 등장한 X가 ‘엑스’라고 읽힐 때도 있다. 동네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엑스선(X-ray)’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뢴트겐선’이라고도 불리는 ‘X-ray’, ‘엑스선’을 처음 발견한 물리학 교수 빌헬름 콘래드 뢴트겐은 이 선에 왜 ‘엑스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뢴트겐은 뛰어난 투과력을 지닌 놀라운 방사선을 발견했지만 그 정체를 밝히지 못했다. 그런 탓에 ‘미스터리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X-ray’, 즉 ‘알 수 없는 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알파벳 X가 ‘알 수 없는’, 혹은 ‘미스터리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또 다른 예로 ‘밝혀지지 않은 일’을 뜻하는 ‘X-file(엑스 파일)’, ‘미지의 요인이나 인물’을 뜻하는 ‘X-factor(엑스 팩터)’ 등이 있다.
X가 미스터리를 상징하는 강렬한 글자로 사용된 건 언제부터일까?
원래, 말이라는 건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확산되는 것인 만큼 그 기원 역시 불분명하다. 맨 처음 특정한 표현에 특수한 의미를 담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 명확한 시작점은 대체로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1637년에 저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미지수’를 ‘X’로 표현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X-mas는 어떻게 읽을까?
X가 떡하니 앞장선 모양새를 보면 X-ray와 구조가 똑같다. 그러나, X-mas를 읽을 때는 ‘X’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엑스’로 발음해 ‘엑스마스’로 읽기보다 ‘크리스마스’로 읽어야 옳다.
그 이유가 뭘까?
모양은 똑같지만 X의 의미가 달라서다.
X-ray의 X는 앞서 설명했듯, ‘밝혀지지 않은(unknown)’ 무언가를 나타낸다. 반면, X-mas의 X는 그리스 문자 카이(Chi, X)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Christos)의 첫 글자 X와 미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ss가 결합돼 생겨난 말이다.
X-ray나 X-mas의 파도를 가볍게 넘겼더라도 X를 우습게 봐선 안 된다. X의 이중생활, 아니 다중생활은 끝이 없다.
X는 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다.
X의 마지막 변신은, 생김새만 보면 한없이 친근하다.
미국에서 길을 가다 “Ped X-ing”, “Duck X-ing” 같은 표지판을 본 적이 있는가?
대충 알 것 같지만 ‘X-ing’을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는 단 한마디도 못 하는 교포 2세를 만난 것처럼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X-ing’의 ‘X’를 읽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힌트는 X의 생김새에 있다.
기다란 나무막대기 두 개가 서로 엇갈린 모양새를 보면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정답은 바로 ‘십자’, 즉 ‘크로스(cross)’다. ‘십자’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cross’에는 ‘길을 건너가다’라는 뜻도 있다.
글씨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이 한정돼 있는 탓에 도로 표지판에 ‘Crossing’이라는 단어를 풀어서 적는 대신 ‘X-ing’이라고 줄여서 적고, ‘크로싱’이라고 읽는 것이다.
X-ing는 ‘엑싱’도 ‘크리싱’도 아닌 ‘크로싱’으로 읽어야 한다.
하와이에서 촬영한 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로에 "AHEAD X-ING SCHOOL"이라고 적혀 있다. 바로 근처에 학교가 있고, 학교 앞에 아이들이 길을 건너는 건널목이 있으니 속도를 줄이라는 경고다.
미국 롱아일랜드에는 오리가 지나다니는 길목이니 속도를 줄이라는 귀여운 도로표지판도 있다.
X는 참 묘한 글자다.
눈에 잘 띄진 않지만,
한 번 등장하면, 엑스선처럼 핵심을 꿰뚫고,
많은 차가 무분별하게 질주하는 도로 위에서 마치 엑스맨처럼 등장해 보행자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뜻밖의 장소에서 X를 마주쳤다면, X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그 속에 감춰진 본질을 꿰뚫어보자.
#알파벳 #번역가의슬기로운언어생활 #x-ing #엑스레이 #x-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