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파자마파티에서 마음이 충만해진 이유
금요일 저녁, 첫째 아이 친구 세 명이 집에 놀러 왔다. 원래는 하룻밤 자고 가는 파자마파티를 하고 싶다고 했었다. 지난달 이사 후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이 생긴 첫째는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자주 말했었다.
아홉 살 친구들이 외박을 하기 위해선 각자의 부모님과 일정도 조율하고 의견도 물어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번엔 우선 당일치기 파자마파티를 하는 걸로 정했다. 저녁 6시쯤 잠옷을 입고 우리 집에 모여서 저녁을 먹고 놀다가 자정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느지막이 헤어지는 걸로 타협했다. 세 아이의 부모님과 연락을 나누는 와중에 한 아이의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큰 결심을 하게 되었냐는 투로 나를 추켜세워 주셨다. 그러더니, "하룻밤이라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라며 당일치기 파자마파티를 제안해 주셨다. 역시 경험자의 조언은 참으로 현명하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하루를 정말 알차게 누렸다. 그야말로 '불금'이었다. 샴페인을 따라야 할 것 같은 플라스틱 파티용 잔에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를 채우고는 치얼스를 외쳤다. 네 명이 우르르 집을 한 바퀴 둘러보다 집 구경이 끝난 뒤로는 잠시 뭘 하고 놀아야 하나 고민하는 정체기가 찾아왔다. 그러다가 이내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훈제오리, 탕수육, 상추'와 같은 단어들을 종이에 하나씩 적어서 들고 나왔다. 종이에 쓰인 단어를 보고 한 사람이 설명하면 나머지 사람이 그걸 보고 맞추는 게임을 하겠단다.
"짜장면의 단짝!"
"짬뽕? 볶음밥?"
"아니 아니, 고기를 넣고 튀겼어!!"
한 친구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미소를 활짝 지으며 자신 있게 외쳤다.
"고기 튀김!!!"
끝끝내 '탕수육'은 맞추지 못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탕수육을 설명한 친구는 몹시 원통해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다가도 틈틈이 내게 와서 조잘조잘 말을 걸어주었다. 기분이 어찌나 좋았으면, 내게 와서는 "이모 예뻐요."라는 뜬금없지만 귀여운 고백도 날렸다. 파티가 끝나고 배웅길에 만난 다른 부모님들은 내 영혼이 털렸을까 봐 걱정해 주셨지만 실은 나는 그날의 파티가 몹시 즐거웠다. 아이들이랑 같이 어울려서 재밌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충만해졌다. 누군가의 즐거움은 내게도 즐거움이 채워지는 느낌을 주었다.
작년에 창작을 업으로 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작업 환경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었다. 영상 제작, 일러스트, 작곡을 하시는 분들을 섭외해서 그들의 작업실을 방문해 작업 환경과 평상시 일하는 과정을 관찰했다. 갑자기 떨어진 일과 주어진 짧은 프로젝트 기간 등으로 인해 준비 과정에서 제법 스트레스가 컸는데 정작 조사하러 갔을 때는 흥미로운 순간들이 많았다.
작곡가의 작업실에 찾아가서 평소 일 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던 중이었다. 그분은 책상 앞에 앉아 설명하셨고, 함께 조사를 하러 나간 사람들과 나는 그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작업하고 있던 음원을 재생하며 한창 설명을 해주시는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둠칫둠칫 리듬을 타고 계셨다. 속으로 '지금 등 뒤에 사람이 셋이나 서있다는 걸 잠시 잊으신 건가...?' 싶었다. 본인이 진심으로 하는 무언가를 신이 나서 설명하는 사람과, 또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며 질문을 주고받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좋았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감정이었다. 피곤에 절어있던 눈이 초롱초롱 뜨이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에너지가 차올랐다.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듯 내 안에 뭔가도 채워지는 듯했다.
아이들이 뿜어내는 즐거운 에너지 덕에 그 느낌을 오랜만에 다시금 떠올렸다. 즐거운 누군가를 바라보면서 채워지는 즐거움. 무언가를 직접 하거나 누릴 때 생기는 즐거움이 큰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다른 누군가의 즐거움을 '지켜보는 것’ 자체만으로 꽤나 충만해지는 사람이다. 요즘 들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듯한 일상 속에서 '뭘 하면 재밌을까', '진심을 쏟을 수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만 거창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자기만의 진짜인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심 불안하기도 하고, '회사를 나가야 하나, 내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야만 나로 사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웃음을 바라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차오르는 이 느낌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일이 거창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즐거움을 지켜보며 내 마음이 충만해지는 걸 느끼는 순간이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중’이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느낀 이 즐거움을 나누면, 또 나 같은 누군가가 잠깐이라도 즐거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주말은 그렇게 아이들의 즐거움을 바라보며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