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고향
작년 말부터 하드보일드 문학, 영화에 푹 빠져 산다. 나는 왜 하드보일드를 좋아할까 생각해 봤는데,
리얼하다. 모든 이야기가 실제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리얼리티가 있다.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리얼리티 취향이었다. 마블 영화를 볼 때마다 재미는 있는데 자꾸 몰입이 깨지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고.
꾸밈이 없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특징인데 문장이 무미건조하다. 확실히 난 이쪽이다. 알맹이 없이 꾸밈으로만 써내려간 문장들을 난 견뎌내지 못한다.
감정의 진폭이 적다. 리얼하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감정이 격하지가 않아서 좋다. 반면 "마음이라는 되직한 크림을 주걱으로 깊게 휘젓는 느낌" 을 주는 작품을 만나면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내가 하드보일드 전성기 때 10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SF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사실은 SF 팬덤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걸 언제 깨달았냐하면 데니스 루헤인의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를 읽고 나서다. 너무 재밌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근 10년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나서 비슷한 소설들을 연달아 읽었다. 얼마전에는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를 시작했다. 보는 족족 재미있다. 그 유명하다던 SF 소설들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재미였다.
SF 쪽은 아무리 열심히 봐도 몰입하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좋다고 하니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하드보일드 쪽으로 가니, 이건 뭐 그냥 쫙쫙 흡수하기 바쁘다. 그때 알았다. 진짜 좋아하는 걸 만나면 세포 하나하나가 알아서 반응하는구나. 뭔가를 좋아하려고 노력한다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구나.
이건 10대 시절과 관련이 깊다. 나의 10대 시절 - 90년대는 하드보일드 영화의 전성기였다. 요즘 슈퍼히어로 무비 나오듯이 양질의 범죄 액션, 필름누아르 콘텐츠가 넘쳐났다. 그때 취향이 형성되지 않았나 싶다. 따져보니 SF 팬들은 주로 내 윗세대들이다. 스타워즈를 시작으로 SF 영화, 소설이 쏟아지던 때가 70~80년대다. 이때 10대 시절을 보냈다면 SF 팬이 되는 게 당연하다. (난 스타워즈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너무 재미없다)
그러니까 하드보일드를 즐긴다는 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거다. 폭력과 살인, 음모와 비리로 가득한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