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1월 10일. 일기 날씨 맑음.
https://brunch.co.kr/@jinf4sb/160#comments
작가님들의 응원에 힘입어.
서울에 잘 다녀왔습니다.
수상을 빙자한 약간의 일탈에 가깝습니다.
새벽 네시 반 배우자님께서 부산역으로 차를 태워줬다. 그냥 얌전히 보내주면 될 것을 '넌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구나.'라고 말했다. 이새끼가..? 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목에서 '님이랑 이혼은 안했자나.' 라는 말이 치밀고 올라오긴 했지만,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하실 것이라... '착한 내가 참는다. 참아.' 라는 마음으로 입술을 꾸욱 눌러 웃었다.
생각해보면, 뭐 틀린 말도 아니기도.. 정말 요즘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고 있긴 하니까. 난임을 겪고 아이를 키우며 눌러놓았던 나의 욕구, 욕망과 같은 하고 잡이 성향들이 발휘되는 것이겠지만 언제 아 만족스럽다아. 이제 그만해야지 라고 할런지. 여튼, 상을 빙자해 아침 여덞시에 서울역에 떨어져.. 서울역 앞 버스 환승 센터에서 이 시골쥐는 당황해하며 버스 한대를 놓치고 10분 뒤 1711번 버스를 탔다.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시골쥐 살려!' 를 속으로 50번쯤. 그렇게 3코스를 짜부되어 광화문KT앞에 내려 세종대왕님도 보고 임금님 집도 보고 디타워에 '회색토끼' 님도 뵈었다. 이 자리를 빌어 토끼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토끼님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콜?"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토끼님과 헤어지고 토끼님께서 알려주신 시청 바로옆 정동길? 을 걸으며 이쁨을 감탄했다. 빌딩 숲 사이에 이런 이쁜 공간이라니? 대박이자나? 라는 마음으로. 사실 서울의 찰나를 올리기 위해 중간에 급 발진하며 브런치에 이실직고한 것에 뿌듯함이 올라왔다. 서울의 가을이라니. 빌딩 숲 사이의 가을이라니. 하며 나에게 어쩐지 특별하게 다가왔다.
수상시간이 되었고 1부만 하고 도망쳐 나왔다. 2부는 난임 분들 레크레이션이라나자! 내가 거길 어떻게 앉아 있어라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건물을 나오며 어떤 분의 수상소감을 곱씹어 보았다. 자신이 지나온 터널이 그리 힘든 것만은 아니였다라는 말에 나는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듯 했다. 그건 낳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내 생각엔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성공해 보았기에. 마음이 저렸다. 답답한 마음을 들숨 날숨으로 내보내며 시청에서 서울역. 서울역 옆에 고가도로를 정원으로 만들어 둔 곳을 걸었다.
바람을 쐬며 조금 걸으니 기분은 환기가 되긴 했다. 부산의 고가도로는 없앨 수 없겠지라고 생각면서. 그럼 온갖 화물차들이 일반 도로를 달릴 것이라... 지하를 뚫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요즘 부산이 싱크홀이 너무 많이 생겨 가지고..'ㅁ' 안될것 같기두..? 라는 마음이 몰아쳤다. 고가도로의 순기능도 있지만, 그 아래 공간은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도시의 골치 덩어리인데 이런건 어찌하려나... 라며 ㅎㅎ
(사고의 전환이 이렇게 삶에 도움이 됩니다.)
혼자 바라보는 해지는 서울이라니.
가족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역시 혼자일 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그리고 이 곳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모든 타인들이 움직임을 기민하게 살피며 서울의 텁텁한 공기를 들여마셨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지, 그리 매연같은 공기는 아니었다.
높은 건물들이 많아 해가 아래로 끝까지 지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건물에 자신의 마지막을 과시하듯 타오르는 오렌지 빛을 반사시켰고 그 빛은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빽백하게 핀 꽃의 틈 사이로 밀려드는 25년 11월 10일의 마지막 햇빛.
추억으로 가지고 가야지.
안녕 서울.
정말 반가웠다.
다음에 또 보자.
제목: 당신과 나의 길고 긴 여정
내용: 나는 8년의 연애를 했다. 연애하는 기간에 남들이 말하는 혼전 임신이 된 적이 없었기에 결혼 후 임신에 대해 우리는 ‘임신이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도였다. 자연임신을 시도하고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바로 난임병원으로 가기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결혼 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로 임신 시도는 불가능했고 4개월이 지나서야 임신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첫 시도에 아기가 찾아 와 줄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두 달 동안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재가 되어 날아갈 가버릴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던 13년 1월. 임신이 된 사실을 알았고, 누구나 그렇듯 임신이 되면 당연히 아이가 태어날 것으로 생각하듯이 우리도 그러했다. ‘아- 임신이 안되는 건 아니었구나.’하고 다행으로 여기며 산부인과로 갔었다. 초음파상 딱 봐도 아기집이 텅 하고 비어 있는 듯한 이상함을 감지했었다. 기분이 묘했지만, 의사는 별말 없이 다음 주에 다시 아기를 확인해 보자는 말을 끝으로 진료를 끝냈다. 다음 주. 아기집은 커져 있었지만, 보여야 하는 난황과 아기는 없는 ‘고사난자’로 진단을 받았었다. 의사는 첫 임신에 그럴 수 있다며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소파수술 후, 몸조리를 위해 피임 후 그해 6월. 다시 임신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텅 빈 아이 집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 텅 빈 아기집은 마치 내 마음 같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그 순간. 두 번의 임신. 두 번의 소파수술. 다음엔 꼭 잘될 거라 말했었다. 하지만, 세 번째 임신도 그렇게 종료되었을 때 의사는 더 이상 나에게 희망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은 다들 한 번쯤 겪는 일이라고 했기에 유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산이 거듭될수록, 임신을 왜 해야 하는지 목적을 잃었다. 언젠가부터 ‘임신, 유지, 출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나의 행복이 아닌 임신, 유지, 출산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고기가 피를 끈적하게 만든다는 말에 고기를 끊고 채식으로 바꿨다.
그 당시 계면활성제가 몸으로 스며들어 해롭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성분이 없는 샴푸, 바디워시 등을 찾아 헤맸다. 그럼에도 네 번째 임신마저 끝내 유지되지 못했다. 임신은 종결되었고, 나는 무너졌다. 한참을 방황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신을 원망하며 소리쳤다. 길을 걷다 울고, 빨래를 널다 울었다. 장을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하늘을 보다가도 눈물이 났다.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다섯 번째 임신 역시 유지 되지 못하고 종결로 끝났다.
나의 모든 노력이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난임병원을 찾았다. 난임병원에서 나에게 아이를 유지 할 때 문제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치료받고, 포기해야 한다면 그 이유라도 알고 물러나기 위함이었다. 기본 검사를 위해 피 여덟 통을 뽑았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 그 자체였었다. 난임이 원인 중 수치로 나올 수 있는 것들은 ‘수치상 정상’이 나왔다. 그렇기에 나는 원인 불명 난임. 코드를 받았다. 이유도 모르고 잃은 네 명의 존재들이 생각이 나 검사지를 들고 의사 앞에서 울었었다. 의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들을 지킬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서러웠다. 원인을 몰랐기에 또 잃게 될까. 두려워졌다.
유산된 첫 아이의 출산일이었을지 모를 출산 예정일 가까워져 올 때면, 한껏 날카로워졌다. 두 번의 출산 예정일이 지나갔다.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엔 산을 탔고, 오후엔 달렸다. 그리고 사람들도 만났다. 그와 임신을 위해 다니지 못했던 여행도 다녔다. 나는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을 배우자도 느꼈을까. 배우자는 나에게 아이가 없는 삶도 괜찮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노력해 본 뒤에도 유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감히 아이가 있는 보통의 삶을 포기하자고 했다. 특별한 삶을 살자고 말했다. 나는 배우자의 말에 부담감을 덜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임신이 되었다. 난임병원에서 임신이 되면 내원해 달라는 말을 남겼기에 그 주 주말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난임병원으로 가니 나와 함께 난임의 끝. 출산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많은 이들이 앉아있었다. 희망과 절망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진료 차례가 되었고 초음파로 확인했을 때 아기집을 이쁘게도 지어놨다. 그 초음파를 바라보며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임신해 보시고 그때도 유지가 되지 않으면 ‘착장 전 유전자 검사(PGT)’를 권한다고 했다.
착상 전 유전자 검사는 유산 위험을 줄이고 건강한 아이를 임신, 유지 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다만,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시험관 시술을 했을 때만 가능했다. 의사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나에게 안겨주며 말했다. “무엇이 원인인지 모르니 일단 다 해봅시다.” 착상에 도움 되는 약과 질정 등을 처방해 주었다. 약과 질정을 받아 나오면서도 내가 이 아기를 유지해 낳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이 될지. ‘이번에도’가 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주 목요일 약간의 출혈이 나타났다. 앞서 겪었던 ‘화학적 유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인가 싶었다. 난임병원에서는 이벤트라 불리는 상황이 생기면 연락을 주길 원했기에 난임병원으로 전화했다. “네. 지금 출혈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나의 말에 간호사는 대답했다. “얼마나 있으세요?”, “막 콸콸. 이런 느낌은 아니에요. 그냥 조금 흐르는 정도요.”,“그러면 병원에 오시는 것이 좋은데 너무 멀다면 가까운 산부인과에 가셔서 유산 방지 주사를 맞고 오세요.”,“유산 방지 주사 뭔가요?”라고 묻자, 간호사는“아, 호르몬제에요. 착상에 도움을 줄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기계적인 말투와 언어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혼자서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거렸던 날들이 떠올랐다. 집 근처 산부인과로 가서 진료를 보았다. 며칠 사이에 아기는 좀 더 자신이 지낼 집을 더 넓혀 놓았다. 의사는 아기가 파고드는 과정에서 피가 고임이 생긴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유산 방지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요?”라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나에게“별 도움 안 될 텐데?”라며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조그맣게 웃으며 “마음의 위안용~?”하고, 말하자 의사는 웃으며 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7주 차 드디어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만약을 위해 ‘크녹산’주사를 처방받았다. 크녹산 주사는 혈류의 흐름을 좋게 해 임신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크녹산 주사는 ‘비급여’였고, 하루에 한 번 맞아야 하는 주사를 개당 8,500원 정도로 계산했던 기억이 있다. 나라에서 주는 임신 지원금은 금방 동이 났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유지만 할 수 있다면 괜찮았다. 그만큼 간절했다. 배에 멍은 늘어났다. 태명도 가지지 못한 아기는 그럼에도 상관없다는 듯이 주 수에 맞게 처음으로 자랐다.
16주가 되었다. 의사는 위험한 시기를 넘긴 것 같다며, 모두가 원하는 난임병원의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주, 또 한 주를 무사히 보낼 때마다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의 끈을 다 놓진 않았다. 친한 지인을 몇 제외하고는 임신 사실을 거의 알리지 않았다. 아이를 세상에 낳고서야 비로소 ‘임신했었다.’ 말할 수 있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은 나를 보며, 사람들은 ‘포기를 하니 아이가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아니 난임을 겪는 모든 이들은 이 기적적으로 찾아준 이 아기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고 노력하고 있다. 뱃속의 이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배에 매일매일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사를 놓고, 약을 먹는 일들이 과연 포기라 할 수 있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뱃속에서 또다시 아기를 잃는 것이 두려워 다섯 번의 임신을 끝으로 여섯 번째 임신을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이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여섯 번째 임신이 감사하게도 난임병원의 도움을 받아 출산으로 이어졌을 뿐,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습관성 유산’이란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극복했더라도 그 끝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닐 수 있었다. 어떠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른 난임 부부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먼 훗날에 좀 더 노력해 볼 걸. 이라는 말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매번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유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희망과 절망 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면, 부디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난임이라는 흔들림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절망과 슬픔. 울음을 삼켜내며 삶을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 내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당신과 나의 길고 긴 여정,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나와 당신이 기억하고 있음을.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그것이 내가 이 글을 남기는 이유다.
당신이 버텨온 그 시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빛나고 있음을. 나는 빛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 당신만의 기적이 어떠한 모습으로든 찾아오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