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4
애플워치 울트라3 모델이 도착했다. 맞다, 러닝을 한답시고 값비싼 장비를 구입한 것이다. 심지어 브레이슬릿도 티타늄 밀레니즈 루프로 맞췄다. 일단 멋지고, 내구성과 부식성이 뛰어나다는 부가적인 이유로. 장비병이라고 불러도 할 말은 없다. 사실 나도 그간 등산을 갈 때마다 '히말라야 풀세트 장비'로 산행을 하는 분들을 보면서 어안이 벙벙하고는 했다. 도대체 대관령 옛길을 오르면서 왜 에베레스트 등반 장비가 필요한 걸까. 그러나 나도 이제 할 말이 없어졌다. 동네 뺑뺑이 러너가 워치는 고급형이라니.
핑곗거리는 꽤 있다. 달리기 기록을 세세하게 남기고 싶었다. 페이스 조절을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하면서 하고 싶었다. 또 다른 기대도 있었다. 비싼 시계를 샀으니 조금이라도 러닝을 더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 암시가 존재했다. 애플워치가 도착함과 동시에 멀쩡히 잘 작동하던 아날로그시계는 보관함 속으로 사라졌다. 기계식 시계라 이틀 정도 차지 않으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나는 새 시계를 샀다는 즐거움과 사치를 했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소비가 헛되지 않도록 저녁을 먹고 뛰러 나섰다. 머리 위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투두둑 때리는 비는 아니라 그냥 뛰었다. 시계를 외부 달리기 모드로 하였더니 실시간으로 페이스를 알려주었다. 손목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작은 알림음도 들렸다. 미니 코치를 데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바퀴에서 속도를 올렸다. 시계가 번쩍했다. 1km 스플릿 기록이 좋게 떴다. 예스!
마라토너는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훈련한다. 페이스메이커는 선수의 반 걸음 앞에서 속도를 조절해 주는 동반자다. 나는 시계가 페이스메이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흡이 가빠지면 심박수 수치가 살짝 깜박이고, 페이스가 흐트러지면 진동으로 손목을 두드린다. 고작 퇴근 후 직장인 러닝이라고 해도 다정한 페이스메이커가 있으면 꽤 안심이 된다.
히말라야 풀세트 등반가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 외부인은 모르는, 실제로 장비를 친구처럼 곁에 두고 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소중함이 있을 것이다. 취미는 행복해야 한다. '장비병'이라는 말은 그저 특정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시계 구입 비용을 전액 '생활비'로 청구 가능하게 해 준 아내에게 고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