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저기요.”
촬영이 끝나고 세트장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정서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세라였다. 정서는 흠칫 놀랐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발이 제멋대로 어기적거렸다. 세라는 불러놓고 말이 없었다. 그 많은 스태프는 다 어디 갔는지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둘밖에 없었다. 알면서도 정서는 괜히 다른 사람을 부른 건지 두리번거리는 어색한 시늉을 했다.
“저기요!”
다시 한번 세라가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높은 언성으로. 높아진 데시벨에는 황당함과 짜증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정쩡하게 반만 돌아선 정서는 ‘저요?’라는 일반적인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어색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네. 그쪽이요.”
세라의 확실한 타겟 설정에 완전히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 뺐던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을지 말지 고민하는 자신이 웃겼다.
“무슨 일로…”
정서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음을 느꼈다. 성대까지 긴장한 것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헛기침으로 목을 달랬다.
“당신, 뭐예요?”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앞뒤 다 빼먹은 그녀의 말에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얼굴을 보니 살짝 찡그린 듯한 표정. 저 예쁜 얼굴에 인상이라니. 인상 쓴 표정도 예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네?”
목소리가 어눌하게 나왔다. 자꾸 왜 이러는지, 정서는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오른손을 들어 허벅지라도 쾅쾅 내려치고 싶었다.
“뭐냐고요.”
여전히 영문 모를 세라의 물음. 이제야 제대로 된 목소리로 답했다.
“뭐가요?”
“아니, 누군데 감독님이 그쪽 말을 듣느냐고요. 이 드라마. 감독님이 직접 각색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유령 작가예요?”
세라는 앙칼진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쏴댔다.
유령 작가라. 뒤에 숨어서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는 그걸 말하는 건가. 유령 작가는커녕 대필도 해보지 않은 정서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시냐고요. 다른 피디라도 돼요?”
세라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자꾸 정체를 물으니 답을 해주기로 했다. 이제 조금 평소 정서의 모습대로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정서는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이 드라마 원작자인데요.”
세라는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소설이든 웹툰이든, 영상화가 되면 원작자는 손을 뗀다. 중간에 원작이 대본화되는 과정에서 어디까지 손을 대서 고쳐도 될지 협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판권이 팔리는 순간 어떻게 찍든 그건 감독의 권한이었다. 저 표정은 아마도 원작자가 대체 왜 촬영장에 와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미겠지.
처음에 ‘왜 감독이 당신 말을 듣느냐’고 물었던 것에도 힌트가 있는 것 같았다. 정서는 윤 피디의 꼬임에 넘어가 결국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제멋대로긴 해도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연출로 일약 인기 반열에 오른 녀석이었다. 몇 번의 촬영장에서 지켜본 바 윤 피디는 스태프나 배우가 자기 연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가끔 옆에 뚱하게 앉아 있는 정서에게 의견을 물어오니 궁금했을 법했다.
세라는 아직 말이 없었다.
“원작 소설 쓴 한정서라고 합니다. 윤 피디가 조언 좀 해달라고 해서 참여하게 됐어요. 고문이라고나 할까. 피디가 배우들한테는 제 얘길 안 했나 보네요.”
정서가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윤 피디와 협의한 과정을 다 말하기도 애매했고 모든 내용을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었으리라. 정서가 정체를 밝히는 순간 세라는 처음부터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긴 했지만, 여전히 말은 없었다. 의외의 인물에 대해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도 되죠?”
“아, 네…”
아까와 달리 작아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세라도 어색하게 고개를 반쯤 숙여 인사했다.
정서와 세라의 첫 대화였다.
세라는 휙 떠나버린 남자의 등 뒤를 쳐다봤다. 그를 불러 세운 지 5분도 안 되는 시간. 괜히 불렀나 싶었다. 원작자였다니. 생각지도 못한 정체였다.
방금 촬영이 끝난 신은 한 번에 오케이가 났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찝찝했다. 감독은 컷 사인을 내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여러 번 모니터링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찍자고 하지 왜 저러나 싶었다. 그러더니 근처에 있던 저 뚱한 남자를 부르더니 둘이 속삭이는 게 아닌가. 저 사람은 대본 리딩 현장에서도, 첫 촬영 때에도 나타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샌가 슬그머니 감독 근처에서 보이더니 이제는 둘이 모니터를 보면서 얘기하는 장면이 종종 보였다. 신기한 건 스태프들은 그런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었다. 상대역을 맡은 남자 배우나 다른 조연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감독이 그 남자를 부를 때는 세라의 신을 찍은 후가 많았다.
세라는 더욱 궁금해졌다. 자신의 연기가 부족한 것인지 감독에게 직접 묻고도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이제 막 단역을 벗어나 조연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감독과 굳이 불필요하게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연기나 대사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밝히는 건 주연 배우나 가능했고 조연도 그나마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기엔 아직 커리어나 인지도가 부족한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이 여섯 번째 겪은 일이었다. 그냥 첫 컷에 넘어간 적도 있었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세라의 답답함은 부피가 커졌다. 저 남자는 강남역 몇 번 출구에선가 흔하게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인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인데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자 바로 쫓아온 것이었다. 주인공의 아내 역할이지만 신인급 조연 주제에 감독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가 없어 저 사람이라도 털어보자는 심정으로.
“뭐야…”
세라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음을 돌렸다. 멀리 주차되어 있던 검정 밴이 다가와 멈췄고 문이 열렸다. 조연급 배우로 올라서며 회사에서 매니저도 붙여주고 차도 지원해 줬다. 다른 배우가 쓰던 중고 차량이었어도 세라에겐 소중했다.
“물어봤어? 누구래?”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매니저가 백미러로 세라에게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세라가 대답이 없자 매니저도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이상했는지 백미러로 흘끔흘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촬영이 끝나고 차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그 남자를 쫓아간 세라였다.
“무슨 일 있었어?”
매니저 장원은 세트장을 빠져나와 국도를 타면서 슬쩍 다시 물었다. 세라의 안색을 보니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았지만 평소에 얌전했던 그녀가 오늘 보인 돌발 행동과 지금의 표정이 꽤 신경이 쓰였다.
장원은 사람을 살피는데 재주가 있었다. 그는 야구선수 출신이었다. 선수 시절 안타를 치고 나갔을 때 상대 투수와 포수의 사소한 습관을 잡아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좋은 눈썰미와 관찰력으로 포수의 사인을 읽어내거나 도루 타이밍을 기막히게 잡아 작전을 성공시키는 게 그의 주특기였다. 주로 2군에서의 일이었지만.
출루만 하면 잘하는데 문제는 타율이 낮았다. 사람을 현미경처럼 살피는 눈썰미가 이상하게 타석에서 공을 볼 때는 작동하지 않았다. 좀처럼 1군 콜업을 받지 못하고 아킬레스건 부상에 자주 시달리던 그는 결국 6년 만에 야구계를 떠났다. 아쉬움은 없었다. 본인이 잘 못 한 거였으니까. 그러다 야구 에이전트를 운영하는 선배의 소개로 정착한 연예계였는데 야구할 때 루 상에서 잘 써먹었던 눈썰미가 의외로 이 세계에서도 요긴하게 활용됐다.
감독이나 작가들과 친해지고 정보를 빨리 얻어오는 것도 중요한 업무지만, 담당 배우의 심리를 파악해 컨트롤해 주는 것도 매니저의 능력이었다. 이전 매니저를 했던 리나가 저만큼 스타가 된 것도 자신의 공이 크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세라를 담당하게 된 지 1년 남짓. 아까는 놀랐지만 그가 보기에 지금 세라의 상태는 살살 물어보면서 달래주면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예민해지면 말도 못 걸었던 리나에 비하면 세라는 귀여운 사촌 동생 같았다.
“오빠. 이 드라마 원작 소설책 어디 있어요?”
그는 작게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빠른 대답. 그가 보아온 세라는 착하고 여린 여자였다.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게 조금 늦기는 했지만, 요즘 연예계는 옛날처럼 나이가 큰 제약이 되진 않았다. 좋은 배역 한 번이면 얼마든지 주연으로 올라설 수 있을 만한 배우였다. 다만 아쉬운 건 자신감 부족. 지난 슬럼프 이후에도 연기력은 괜찮다는 평이 나왔다.
그런데 장원의 눈에는 세라가 눈치를 심하게 보는 느낌이었다. 작은 역할이라도 몰입은 잘하는데 컷이 나온 후 항상 연출진의 눈치를 살폈다. 틀렸다고 혼나지는 않을지 두려워하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처음 대표가 세라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이해되지 않았는데 이젠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장원은 세라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잘 케어해서 제2의 리나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가 읽고 있는데? 집에 있어.”
정서의 책은 세라가 캐스팅되었을 때 연기에 참고하라고 장원이 직접 사다 줬다. 세라가 우선 대본을 보겠다길래 장원이 먼저 읽고 있었다. 그는 연기할 일은 없어도 언제든 배우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 생각하면 안 읽던 책도 읽었다.
“아… 그러면 다 읽으시면 갖다주실래요? 죄송해요.”
굳이 죄송까지 할 일은 없는데 세라는 종종 필요치 않은 순간에도 이런 말들을 자주 하곤 했다. 이런 그녀였기에 아까 보였던 행동에 놀란 것이었다. 매니저는 굳이 그런 습관까지 지적하진 않았다. ‘죄송은 무슨~’ 이런 말도 세라 같은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괜찮아. 거의 다 읽었어. 재미있어서 금방 읽게 되던데? 오늘 다 보고 내일 갖고 올게.”
“감사해요.”
세라는 짧은 답으로 대화의 터널을 닫았다. 매니저는 급하지 않았다. 도로는 운전하기 적당했고 파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도 아직 시간이 충분했다. 자유로의 널찍한 도로로 접어들고 퇴근 시간 전에 도착하려 열심히 달리던 무렵.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멀찍이 풍경만 바라보던 세라가 작게 말했다.
“원작자래요. 그 사람.”
눈만 끔벅끔벅. 세라가 그랬던 것처럼 매니저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새 순식간에 바뀐 빨간 불을 보고 급정거를 하며 비상등을 켰다. 덕분에 세라는 멍한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인물정보에는 프로필 사진도 없었고 출판사에서 쓴 듯한 짤막한 소개 문구만 나타났다.
— 파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며 매일 읽고 쓰는 평범한 글쟁이.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가슴 속엔 항상 글에 대한 꿈을 갖고 살았다.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소설 <그늘심판>이 20만 부 이상 팔리며 국내 소설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동경하던 선배를 대신해 글을 쓰게 됐다.”는 그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기대된다.
‘특이한 사람이네…’
이리저리 스크롤을 내려봐도 정서가 쓴 책의 후기만 나왔다. 그에 대해 달리 얻을 게 없어서 그냥 특이한 사람으로 치부하며 화면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라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녀는 어느새 정서의 책과 파주에 있다는 그의 책방을 검색하는데 빠져들었다. 곧 한 블로그 게시물을 발견했다. 효민이 책방 홍보용으로 올린 게시물이었다.
— 소설 <그늘심판>, <신의 직장>을 쓰신 한정서 작가님이 직접 운영하는 「운정책방」입니다.
정서는 며칠째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화를 한 게 3분은 됐을까. 그 짧은 시간이 정서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 쓴 분량도 4줄에서 멈춰있었다. 한번 집필을 시작하면 못 해도 하루에 1~2페이지는 쓰곤 했던 정서였는데 요 며칠은 반도 채우지 못한 채 퇴근했다.
세라도 자신의 정체를 듣고 당황한 것 같았지만 정서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 그녀가 왜 자기를 쫓아왔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런 걸 고장이 났다고 하는 건가. 정서는 웃음이 났다. 시간은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책방에는 근처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 두 명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낮에 자주 들리는 학생들이었다.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책을 좋아하는 모습이 예뻤다. 눈으로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오늘도 글렀다 싶어서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오늘도 작업 얼마 못하셨나 봐요.”
정서의 인기척에 카운터에 앉아 있던 효민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애쉬 그레이 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잘 모르는 정서가 잿빛이라고 말했다가 효민에게 한 소리를 들었었다)
“응. 요즘 잘 안되네. 시간 되면 들어가.”
“촬영장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효민이 물었다. 걱정돼서 묻는 얼굴이 아니라 장난스럽게 묻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타이핑 소리만 들어도 요 며칠 작업이 잘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효민은 비타민 같은 아이였다. 가끔 말 많은 손님이 오면 맞장구도 잘 치고 본인도 수다를 좋아했다. 하루 6시간 넘게 같이 있는 정서가 말이 많이 없는 편인데도 거기에도 잘 맞췄다. 알바생이 사장을 배려해 주는 느낌이었달까. 그녀를 고용한 후 손님도 늘고 자신의 작업 능률도 높아졌기에 정서는 두 달 만에 효민의 시급을 삼천 원 올려줬다. 매출이 그리 높지 않은데 갑자기 높이시면 부담되지 않느냐는 효민의 걱정에 정서는 이렇게 말했다.
— 돈은 인세로 벌어. 책방은 그냥 내 쉼터 같은 곳이자 작업 공간이야.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고. 네가 있어서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효민은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정서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워낙 말이 없는 정서라 몇 달이나 지나서야 그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 수 있었다. 서울에서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그것도 공기업을) 그만두고 글을 쓰더니 책을 내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작가가 돈을 얼마나 버는지는 몰라도 책방까지 열고 문학관도 운영하고 있었다. 금수저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대학에 가고 괜찮은 회사에 취업하는 게 가장 좋은 길인 줄 알았던 효민에겐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이 책방이 좋았다. 아늑하기도 하고 일도 많이 없는데 시급도 셌고 공부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빨리 취업해서 나가라는 정서의 츤데레 같은 덕담이 고마우면서도 야속함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새 공부보다는 책방 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정서는 책방 주인이라면서 대체 마케팅이나 홍보에 관심이 없었다.
요즘 세대답게 책방의 SNS 계정을 만들고 꾸준히 관리하니 눈에 띄게 손님이 늘었다. 내 가게는 아니지만 매출 늘리는 재미를 느꼈다. 동기들이 하나둘씩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별로 부럽지 않았다. 두세 달만 지나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는 친구들이 열에 아홉이었으니까. 그래서 2년째 휴학 중인 효민은 다음 학기도 휴학을 신청할지 고민 중이었다. 취업 전쟁을 잊게 해주는 이 공간이 좋아서. 온라인 스토어를 개설한 후엔 택배 주문도 늘어서 일이 많아졌어도 그녀는 즐거웠다. 드디어 잘하는 일을 찾은 것 같아서 자기도 가게를 운영해 볼까에 대해 신중히 고민하는 중이었다.
“일은 무슨… 가끔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이따가 문 꼭 잠그고 가. 불도 잘 끄고. 손님 없으면 일찍 닫든지. 먼저 간다.”
“들어가세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떠나는 정서의 모습에 몰래 웃었다. 정서가 당황하면 말이 길어지는 습관이 있다는 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1년 가까이 본 정서가 가는 곳이라고는 책방, 문학관과 마트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가 저렇게 당황할 만한 일은 여자밖에 없었다. 그의 오래전 여친이 무심코 책방에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분명 촬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이리라. 그녀는 매주 한 번은 들리는 정은이 오면 수다 떨 생각에 벌써 입이 근질거렸다. 정은은 이 조용한 책방과 주인을 대신할 아주 좋은 수다 상대였다. 효민은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부르며 마른 행주를 들고 정서가 작업했던 책상을 닦아냈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어도 정서가 남자치곤 꽤 청결한 편이었던지라 딱히 청소할 것도 없었지만 그녀는 왠지 그러고 싶었다.
정서의 일상은 단순했다.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준비한 후 열 시에 책방 문을 연다. 두세 시간쯤 독서하다가 효민이 오면 같이 점심을 시켜 먹었다. 오후에는 글을 쓰거나 자료 조사를 하다가 여섯 시에 퇴근했다. 저녁 여덟 시에 문을 닫는 책방의 마감은 효민의 몫이었다. 가게 마감을 알바에게 맡기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서는 지금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야구를 보는 것 외에 거의 유일하게 흥미를 갖고 하는 일이 요리였다. 큰 양수 냄비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고 호박과 대파, 양파, 두부를 썰고 마늘까지 다져 넣고는 다음 요리를 준비했다. 웍을 달구더니 양념에 재워놓았던 돼지고기를 볶고 도마 위에 남은 야채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코딩이라도 해놓은 듯 막힘없는 동선과 쉬지 않는 손놀림이 휙휙 불 위를 오갔다. 찌개와 메인요리를 같이하는 솜씨가 한두 번이 아닌 듯 능숙해 보였다. 환풍기를 틀었음에도 구수하고 달큰한 냄새가 집안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혼자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이었다. 화구가 5개인 가스레인지에 10명은 넘게 앉을 만한 기다란 원목 테이블, 그 뒤에 보이는 거실의 대형 카우치로 봤을 때 대가족이라도 사는 듯했다.
정서가 요리하고 있는 건물은 멀리 작은 저수지가 보이는 마을 끝에 있었다. 빨강, 검정, 아이보리 등 색색이 다양한 벽돌로 외벽이 꾸며져 따스함이 느껴지는 2층 건물이었다. 건물은 그냥 주택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지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 부지도 꽤 넓었다. 현관문 오른쪽에 있는 큰 통창에는 갈색 원목으로 포인트를 줬고 널찍한 거실과 함께 정서가 요리하는 주방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이미 어둑해진 시간의 창가에는 대부분 불이 켜져 있었다.
정서가 찌개 맛을 보고 부족한 간을 더 넣고 있을 때 주방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발소리가 쿵쿵 울리는 게 제법 체구가 큰 사람인 듯했다.
“이야, 오늘은 된장찌개에 두루치기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주방 벽 끝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두루치기 아니고, 제육볶음이에요.”
“그게 그거지 뭘.”
덩치가 쿵쿵거리며 다가와 완성된 요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틀려요. 요리 방법이. 두루치기는 육수가 들어가서 조금 자작하고, 제육볶음은 볶기만 한 거고.”
정서는 뒤에 선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찌개 맛에 만족한 듯 불을 껐다.
“아니, 두루치기든 제육볶음이든. 어차피 맛있을 거 아냐.”
덩치는 큰 손으로 정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우리 작가님한테는 중요하지. 거 자꾸 흉기 같은 손으로 사람 치지 말라니까.”
덩치가 거인으로 보일 만큼 아담한 체구의 긴 생머리 여성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덩치가 쿵쿵거렸다면 생머리는 스윽, 스윽 가벼운 슬리퍼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생머리의 잔소리를 들은 덩치가 머쓱한 듯 손을 내리고 아일랜드 식탁에 놓인 식기를 챙겼다. 이어 생머리 여자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식기를 챙기고 밥과 국을 담았다. 정서는 제육볶음을 대접 3개에 나눠 담고 테이블 중간중간에 놓고는 생머리에게 말했다.
“보라 작가님. 종 좀 울려주실래요?”
“오케이.”
보라라고 불린 생머리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종을 흔들어 달랑거렸다.
이곳은 문학관이었다. 문학관 관리인이 바로 정서의 또 다른 직업이고 정서가 저녁밥은 효민과 함께하지 못하고 먼저 퇴근하는 이유였다.
보라가 울린 종소리에 1, 2층의 각 방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나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먼저 주방에 와있던 보라와 덩치에 이어 남자 다섯과 여자 둘이 시끌벅적하게 주방으로 들어왔다.
“와, 오늘은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진짜요? 저는 별로 못 썼는데. 아, 오늘 된장찌개다!”
2층에서 함께 내려온 두 여성 작가가 재잘대며 앞서 두 사람이 했던 것처럼 식기를 들고 밥과 국을 담았다. 1층은 남자들이 쓰고 2층은 여자들이 쓰는 듯 여성 작가들은 2층에서만 나타났다. 뒤따라온 사람들도 누구는 기지개를 켜고, 누구는 퀭한 눈을 하고, 각양각색으로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그사이 정서는 김치와 다른 밑반찬들을 접시에 담았고 덩치가 정서를 도와 음식을 테이블로 날랐다.
문학관에는 관리인 자격으로 정서가 정한 규칙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매일 오후 7시의 저녁 식사 시간. 작가 개개인들의 집필 시간과 습관이 달라 아침, 점심은 각자 해결하지만, 저녁밥만큼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함께 하도록 정했다. 아일랜드 식탁 옆에 놓인 선반에는 라면이나 시리얼 같은 간편식이 비치되어 있었고 그게 싫으면 전날 남은 음식을 데워 먹으면 되었다.
그래서 정서는 항상 저녁밥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모인 남녀 작가들은 나이와 경력을 떠나 서로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집필 이야기든 요즘 이슈든 잡담이든 하루 한 번은 다 같이 모여 얼굴을 마주했다. 일 년 주기로 바뀌는 입주 작가들 사이에 간혹 내성적인 사람이 들어왔을 때 외롭지 않도록. 불편하더라도 하루 한 번, 못해도 한 시간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외되지 않도록 만든 규칙이었다.
“최 작가. 제육볶음 안 먹어?”
테이블 끝 쪽에 앉아서 먹던 덩치가 말했다. 덩치 앞에 있던 접시의 제육볶음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테이블 가운데에서 조용히 먹고 있던 30대 여성 작가가 마치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젓가락으로 접시를 쿡 찍고 말했다.
“천천히 먹고 있는 거예요. 손댈 생각 말아요.”
“아니, 음식 아껴서 뭐 해. 남을 거 같은데 이쪽 좀 덜어줘.”
여작가 둘과 정서가 앉은 테이블 가운데의 음식은 양이 많이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올해 문학관에 입주한 작가들은 남자 다섯에 여자 셋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는 정서까지 총 9명이 자연스레 셋씩 나뉘어 먹고 있었다. 그중 아까 먼저 주방에 나타났던 덩치와 보라, 그리고 영준이라는 다른 남자 작가 한 명이 유독 식탐이 많았다. 그들이 소화하는 식사량이 남달라 정서는 항상 더 넉넉하게 장을 봐야 했다. 작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식탐 3인방과 나머지 6명으로 테이블 자리 배치가 구분되었다.
“다 먹을 거니까 탐내지 마시고. 냄비에 남은 거 갖다 드세요.”
최 작가가 그릇을 슬며시 덩치의 반대쪽으로 밀며 말했다.
“혜리야, 걱정 말고 편하게 먹어. 당신이 가서 좀 갖고 와. 맨날 영준이랑 나만 움직였잖아!”
멀리서 체구만 보면 딸처럼 보이는 보라가 젓가락을 들고 덩치를 쏘아붙였다. 160 센치 정도로 키가 작은 보라는 마른 체형인데도 그 많은 음식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덩치와 비슷하게 먹었다. 덩치는 투덜거리며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의자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냈다.
1월에 문학관에 새로 입주한 작가들은 2달쯤 지난 후 남작가 중에서는 덩치가, 여작가 사이에선 보라가 주축이 되었다. 작가 경력이 가장 길었던 둘은 마흔셋 동갑이었다. 하필 성도 장 씨로 같았던 바람에 사람들은 덩치를 장 작가, 보라는 보라 작가로 부르곤 했다.
“15인분 했는데, 오늘도 남는 게 별로 없겠네요. 양을 더 늘려야 하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양 늘리면, 는 만큼 저 인간이 더 먹을 거야. 그냥 둬. 지금이 딱 좋아. 장 작가. 내일 먹을 건 남겨놓고. 오늘 설거지 당번인 건 알지?”
보라가 정서와 덩치에게 연달아 한 말에 작가들이 피식하며 웃었다. 요리는 정서가 해도 설거지는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당번을 맡았다.
하나둘씩 식사가 끝나고 덩치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설거지를 마쳤다. 주방에는 큰 냉장고와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식사가 끝난 작가들 몇몇은 작은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를 하나씩 꺼내 들고 거실 소파로 향했다. 함께 저녁을 먹은 뒤 한잔하고 싶은 사람은 거실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게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본인도 맥주를 가장 좋아하는 정서는 작은 냉장고에 캔맥주를 항상 채워 놓았다. 다만, 맥주 외에 다른 술은 허용되지 않았다.
작가들이 술에 취해서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다가 싸우는 것을 몇 번 봤던 정서가 4년 전부터 바꾼 규칙이었다. 처음에 자기는 소주파라며 아쉬워하던 보라도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하게 금요일이 다른 술도 허용되는 날이었다.
1, 2층에 남자 방과 여자 방 각각 다섯 개 실. 총 10명이 입주할 수 있는 문학관의 하루는 마치 게스트하우스 같기도, 대학 기숙사 같기도 했다. 회사에선 동료들이 많아도 외로움을 느꼈던 정서는, 나이도 경력도 다양한 작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정서의 인생에서 가장 의지하고 따르던 선배의 유산과도 같은 이 공간을 어떻게든 오래 유지하고 지키는 것. 글을 쓰는 것 외에 정서가 유일하게 즐기고 책임감을 갖고 하는 일이었다.
저녁 일곱 시. 작가들의 집필 공간이 시끌벅적해지는 시간. 돌과 잔디로 덮인 마당을 지나 보이는 주차장 입구에는 「새벽 문학관」이라 적힌 큰 간판석이 간접 조명을 받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