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오는 동안 정서는 세라에게 별 말을 걸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었는데도 아직 밤이 조금 쌀쌀했다. 세라가 몸을 움츠리는 걸 보고 에어컨을 껐다. 차는 국도를 달리다가 곧 외진 길로 들어섰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어서 살짝 무서웠다.
“피곤하죠? 거의 다 왔어요.”
“아, 네…”
걱정 해주는 말이었지만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세라는 조금 섭섭했다.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정서는 마을을 지나쳐 계속 운전했다. 길이 이어진 곳 멀리서 조명이 밝혀진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인가요?”
“네. 저희 문학관이에요. 차 없으면 오는 게 좀 힘들어요.”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지긴 해도 날이 밝으면 주변이 예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 문학관에 도착한 둘은 차에서 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꽤 규모가 큰 건물에 세라가 놀랐다.
“생각보다 크네요.”
“그냥 뭐… 이쪽이에요.”
그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갔다. 세라는 신발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문학관은 기숙사 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내부는 큰 가정집처럼 아늑했다. 작가들은 다들 자기 방이나 2층 작업실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서는 문학관 내부를 간략히 설명했다. 문학관은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1층 왼쪽에는 남자 작가들의 방이, 오른쪽에는 거실과 주방, 세탁실 같은 공용 공간이 있었다. 2층도 왼편에 여자 작가들의 방이 있었는데 오른쪽은 방에서 작업하기 싫은 작가들을 위한 1인 작업실과 휴게실이 있었다.
정서는 원래 문학관은 남자 방 다섯 개와 여자 방 다섯 개가 있는데 올해는 여자 방 2실이 빈다고 했다. 식사는 1층 주방을 공동으로 쓰고 있어서 입주 작가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고도 미리 귀띔했다. 정서는 2층으로 안내했다.
“맨 끝에 205호예요. 비밀번호는 0000. 들어가면 바꿔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서는 편히 쉬라고 말하고 바로 내려가려 했다.
“저기…”
정서가 뒤돌아봤다. 괜히 바닥만 내려다보던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고마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바로 올게요.”
정서도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가 내려간 후 세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 여성 공간으로 들어가는 중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중문을 열자, 무드등 덕분에 포근한 느낌을 주는 복도가 나왔다. 바닥엔 카펫이 깔려 있었고 양옆으로 5개의 방문이 보였다. 세라는 맨 끝에 있는 205호를 향해 걸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내부는 침대, 책상, 작은 냉장고에 옷장과 화장실 등 있을 건 다 있어서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세라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옆으로 쓰러졌다. 기운이 없었다. 정서와 효민이 친절을 베풀어 주고 문학관의 아늑함에 잠시 안심했지만, 낮에 겪은 일 때문에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다. 요 며칠 잠도 거의 못 자서 졸음도 쏟아졌다. 불도 안 끈 채 이대로 잠들까 싶다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냐…”
상황과 상관없이 소식을 보내는 본능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 얼른 따뜻하게 씻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은 잠시 누워있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놀라서 일어났다. 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집에서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한 게 떠올랐다. 핸드폰은 꺼놓은 지 오래였고 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세라는 무력감에 빠져 다시 쓰러졌다. 기민서와는 아무 관계도 아닌데, 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접근한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똑똑…
무기력하게 누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울린 노크 소리에 흠칫 놀라 일어난 세라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밖에는 몸매가 드러나게 달라붙는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모자를 쓴 여자가 서 있었다. 차림 때문인지 웃는 표정 때문인지 왠지 여자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정서 선배이자 여기 종종 놀러 오는 오정은 작가라고 해요. 실례지만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왠지 모를 그녀의 당당함 때문인지 엉겁결에 정은을 안으로 들였다. 갑자기 나타난 정은은 두툼한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신지…”
“잠시만요. 에고, 무거워라.”
그녀가 왜 왔는지 궁금하던 차에 정은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옷가지와 양말, 세면도구, 화장품 등 여성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세라는 내용물을 보고 놀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정은은 세라가 놀라지 않도록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밤중에 정서의 연락을 받고 이것저것 캐묻더니 본인의 여벌 옷과 잠옷을 챙기고 간단한 생필품까지 사 온 것이었다.
“얘가 눈치가 좀 없어서 여자한테 뭐가 필요한지 모를 것 같더라고요. 잠만 재우면 다인 줄 아나. 그래서 나한테 전화한 거겠지만, 아무튼 옷 사이즈는… 비슷할 것 같고 양말은 이거 신어요. 급한 대로 사 왔어요. 다른 건 내일 나랑 같이 사러 가요.”
이곳에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은은 오래 지낼 사람처럼 세라를 대했다. 사연을 대충 들었을 텐데 따로 묻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정은은 가방과 같이 들고 온 봉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끼니도 못 챙겼을 것 같은데 배 안 고파요? 먹을 것 좀 사 왔는데. 김밥에 컵라면 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장난스러운 표정에 웃음이 나온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방을 나와 조용히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 휴게실로 향했다.
“여기가 방음이 잘 되어 있긴 한데 가끔 예민한 작가들이 있어요. 슬리퍼 신었어도 살살 다니시면 좋아요.”
복도에선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쉿 소리를 내던 정은이 2층 거실로 나와서야 말했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소파와 원형 테이블이 곳곳에 놓여있는 휴게실은 아담한 거실 같았다. 아일랜드 식탁이 놓인 간이 주방 주변엔 마실 것과 간편식이 마련돼 있었다. 정은이 다가가 찬장을 열자, 칸마다 컵라면이 종류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세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 각자 마음에 드는 컵라면을 집었다. 포트에 물을 끓이고 물을 붓자, 라면 냄새가 삽시간에 휴게실을 채웠다. 라면이 익는 동안 정은이 봉지에서 김밥을 꺼내며 말했다.
“정서가 혹시 모르니 간단한 요깃거리도 사와 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다행히 문 연 데가 있더라구. 입맛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들어요. 이럴 때 더 든든하게 먹어둬야지.”
“감사해요. 사실 진짜 암담했었거든요. 가방 보고 깜짝 놀랐어요.”
“에이, 내가 뭘 한 게 있다구. 정서가 세라 씨 아무것도 못 챙겨 나온 것 같다더라고요. 걔가 말은 안 해도 은근히 츤데레 같은 면이 있어요.”
정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정서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은은 세라를 보니 정서가 챙긴 미역국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았다. 그녀 역시 효민처럼 눈치가 빨랐다.
“그래도요. 늦은 시간에 이렇게 해주시는 게 쉽지 않은데.”
귀찮았을 법도 한데 일면식도 없던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준 정은이 정말 고마웠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하는 것도 오히려 언니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서 부탁이니까요. 남한테 폐 끼치는 거 죽도록 싫어하는 녀석이에요. 이 시간에 그냥 부탁할 녀석이 아니죠.”
“오래 알고 지내셨나 봐요.”
“거의 이십 년 됐죠. 사회에서 만난 친누나랄까? 대학 때 같은 문학 동아리였어요. 그땐 완전 코흘리개였는데. 걔 신입생 때 어땠는지 알려줄까요?”
두 사람은 늦은 간식을 먹으며 정서의 20대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술도 잘 못 마실 때 미팅 나갔다가 코 박고 잠든 이야기부터 엉망이었던 패션 취향까지. 정은은 신난 듯 줄줄이 늘어놓았다.
“글쎄 같은 옷을 일주일 내내 입고 다녔었다니까요.”
“상상이 안 되네요. 지금은 옷도 잘 입으시던데.”
“그게 다 내가 잔소리해서 바뀐 거라니깐. 어휴, 그땔 봤어야 해. 한정서 용 됐다 진짜.”
정은의 입담에 세라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덧 음식도 다 비우고 정은이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왔다.
“그러면 정서 씨도 여기서 생활하는 거예요?”
“정서는 이 건물 옆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살아요. 여긴 책방 퇴근하고 와서 작가들 저녁밥 해주고 한번 둘러보고 별일 없으면 그때 자기 집에 가요. 대표가 따로 있긴 한데… 아무튼 여기서 정서는 관리인 역할만 해요. 하숙집 같달까?”
실제 대표라는 사람 얘기가 나올 때 정은의 안색이 살짝 변한 것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둘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은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슬쩍 물었다.
“여기 작가들이 아무리 담쌓고 글만 쓰는 사람들이지만 기사가 워낙 크게 나서… 조만간 다들 알게 될 거예요.”
세라도 알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 호텔은 무서웠고 차마 부모님 댁에도, 몇 없는 친구에게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서 좌절했다가 막연히 찾아온 자신을 품어준 게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정서와 처음 와 본 이 문학관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네… 그런데 스캔들 진짜 아니에요.”
“알아요.”
“네?”
정은이 대뜸 알았다고 하는 말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당사자 앞이라 예의상 안다고 했다기엔 너무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가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아 조금 불쾌감도 느껴졌다. 세라의 표정을 읽었는지 정은이 얼른 말했다.
“저 드라마 작가예요. 지금은 쉬고 있지만, 예전에 다른 작가랑 같이 쓴 드라마에 기민서가 출연했었어요. 그래서 알아요.”
그땐 기민서가 가수 활동을 접고 연기자로 전환하던 시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기가 뛰어나진 않지만, 화제성 때문에 업계에서는 그를 종종 캐스팅했었다. 하필 정은이 이제 막 신인 작가에서 벗어난 시절에 쓴 드라마에 그가 출연하게 됐다.
“드라마는 잘 됐죠. 시청률도 괜찮게 나왔고. 그런데 기민서 그 인간 회식할 때나 휴식 시간에 맨날 여배우들, 여자 스태프들한테 집적거리더라고. 그때도 스캔들 났었어요.”
“그러셨구나…”
“별 재미있지도 않는 농담이나 지껄이고. 지금 그랬으면 꺼지라고 할 텐데. 아오, 그땐 나도 잘 모를 때라 웃어준 게 억울해 죽겠네. 그 인간 아직도 그러죠?”
“풉. 네. 관심 가져줄 때까지 계속 그러잖아요. 현명하셨던 거죠.”
둘은 기민서의 흉을 보면서 한참을 떠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스캔들이라는 가십거리에 더 몰입했다. 기민서의 악성 팬들이 세라에 대한 유언비어까지 만들어 내면서 상황은 세라에게 불리했다. 세상이 던지는 창칼의 표적은 주로 만만한 사람이 대상이 되었다.
“저 이제 겨우 다시 활동 시작한 건데 스캔들 때문에 또 쉬어야 하는 건 아닌가…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기민서와 엮였던 여배우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은은 낙심한 세라를 달랬다.
“그런 인간 때문에 여기서 주저앉으면 억울하잖아요. 일단은 잘 버텨봐요. 무너지지 말고 힘내자고요.”
정은은 세라를 토닥이다가 아까부터 속으로 고심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저기, 세라 씨. 조심스러운 말이긴 한데… 상황 좀 나아질 때까지 당분간 여기 이 새벽 문학관에서 스태프로 지내는 건 어때요?”
“스태프…요?”
정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믿고 한번 해보자는 자신감이 표정에 담겨 있었다.
* * *
문학관에서의 첫날. 간밤에 정은과 한창 수다를 떨었던 세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쌓였던 피로와 포만감이 겹쳐 하품하던 그녀를 정은이 얼른 들여보냈다. 씻을 틈도 없이 기절하듯 잠든 세라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정은은 아침부터 문학관에 와 있었다. 정서의 루틴은 오늘도 정확했다. 평소 출근 시간인 아홉 시 반에 오늘은 책방 대신 문학관으로 향했다. 간밤에 정은의 연락을 받았다. 세라에 대해 급히 논의할 일이 있다며. 정서도 대충 어떤 내용일지 예상은 했다. 문학관 작가들에게 세라의 거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세라를 방 안에서만 지내게 하는 건 수감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됐습니다.’라고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없었다. 입주작가 중 악의적으로 세라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릴 사람은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정서가 관리하는 문학관이라 해도 일방적인 통보는 정서가 하기 싫었다. 작가들이 그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문학관은 중간에 사람이 바뀌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개인 사정으로 갑자기 퇴소하는 작가는 있었어도 중간에 새로 입주하진 않았다. 처음엔 소설과 에세이 작가만 받다가 지금은 영역을 넓혀 웹툰 작가까지도 입주하게 됐다. 그래도 정서는 정원이 미달해도, 갑자기 자리가 비어도 새로 입주 신청을 받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 물을 흐리거나 적응하지 못해서 다른 작가들까지 피해를 보느니 안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꽉 차면 차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최소한의 규칙 안에서 자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게 정서의 관리 방식이었다.
그 문제를 지금 정은이 해결해 주고 있었다.
“스탭이라고?”
“응. 왜 종종 여기서 ‘새벽인들의 뒷담화’열 때 효민이가 와서 행사 도와준 적 많았잖아.”
‘새벽인들의 뒷담화’는 새벽 문학관에 입주했던 작가가 쓴 작품이 좋은 성과가 나오면 그들을 초빙해 대화를 나누는 행사였다. 여기서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거나 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됐다거나 하는 소위 대박이 난 경우였다. 그들이 와서 들려주는 집필 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현재 열심히 작업 중인 작가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날은 금요일이 아니어도 모든 술이 허용됐고 작가들끼리 교류를 나누며 크고 작은 자극을 받았다. 성공한 작가들은 대부분 문학관에 많든 적든 기부도 했으니, 정서로서는 사례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행사를 추진했다. 올봄에도 2년 전 입주했던 작가의 시나리오가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져 초빙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효민이 일을 도왔는데 정서는 그녀를 “오늘만큼은 문학관 스태프예요.”라고 소개하곤 했었다.
“세라 씨한테 그 임시 스탭을 맡기자?”
“응. 그러면 집필도 안 하는 사람이 여기서 생활하는 걸 뭐라고 설명할래? 나도 어제 갑자기 생각나서 제안해 본 건데 의외로 괜찮을 것 같단 말이지?”
정은은 세라에게 청소하고 집안일 하는 스태프가 아니라 작가들이 쓴 글을 비평해 주는 스태프를 제안했다.
본디 작가들이란 자기가 쓴 글에 다른 사람의 평을 원하면서도 꺼리게 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좋은 평을 듣고 싶은데 나쁜 평이 나올까 봐 걱정하고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많았다. 정서가 그랬다. 창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기에 서로가 일부러 평을 아끼는 경우도 있었다.
“작가들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까? 세라 씨 여기 있다는 이야기 밖으로 나가면 곤란해.”
“아이고. 걱정도 크다. 너도 그동안 작가들이랑 친해졌으면 알 거 아니냐. 저 글에 미친 배고픈 인간 중에 그럴 사람 없어. 장담해.”
“알아… 그냥 혹시나 해서. 세라 씨한텐 중요한 부분이야. 여기에서만큼은 편안히 있게 하고 싶어.”
“이해해. 근데 그 부분은 내려놓고. 세라 씨도 그동안 대본도 많이 접해 봤을 거 아냐. 데뷔 10년 짬밥이면 좋은 대본, 나쁜 대본 보는 눈은 있지 않겠어? 작가들이 비평을 안 맡기더라도 명분은 괜찮잖아.”
“세라 씨는 뭐래?”
“뭐, 괜히 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지. 근데 세라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눈치 덜 보이고 좋지 않겠어? 어때! 이 누나의 비상한 머리가.”
은근슬쩍 ‘세라 씨’가 아닌 세라라고 말한 정은은 의기양양했다. 정은의 생각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가려운 곳을 긁어준 느낌이었다.
“일단 본인 생각도 좀 들어보고. 아직 자고 있으려나?”
정서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그녀는 기대한 내가 바보라며 한탄했다. 시간은 어느새 11시가 다 되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햇살이 가득했다. 문학관 테라스 밑에 둥지를 튼 제비 부부는 먹이 사냥을 다니느라 분주히 날아다녔다. 근처를 날아다니던 참새 무리가 문학관 앞에 내려앉아 바닥을 쪼아댔다.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 듯 잠든 세라가 살짝 뒤척였다. 그때 길고양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나타나 슬며시 다가갔다. 위험을 느낀 참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자리를 뜨는 순간 무리 전체가 시끄럽게 울며 날아올랐다. 기회를 놓친 고양이는 아쉬운 듯 하늘만 쳐다보다 다시 사라졌다.
잠에서 반쯤 깨고 있던 세라가 새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직 잠결에 눈에 들어온 낯선 환경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여기 문학관이지…”
세라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몇 번 쓸어 넘겼다.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인 게 아쉬웠다. 대신 그만큼 푹 잤는지 개운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면서 조금 정신을 차렸다. 순간 다시 들려온 새소리에 그때야 바깥 풍경이 들어왔다. 세라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리 작지 않은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높낮이가 다른 산과 산책로를 따라 둘레에 심어진 은행나무가 저수지와 어울려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서울에선 비둘기만 눈에 밟히던 것과 달리 처음 보는 새들도 이곳저곳에서 제멋대로 노닐고 있었다. 근 10년 동안 서울에서 보던 도심 속 회색 풍경과는 너무나도 달라 이국적인 느낌까지 들었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저 풍경 속에 같이 담기고 싶었다. 그때 저수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세라의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요 며칠 생긴 안 좋은 일들이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세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조금 기분이 좋아진 세라는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욕실로 향했다. 어제 정은이 챙겨다 준 여벌 옷들과 세면도구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일단 어제부터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이 찝찝해 얼른 갈아입고 싶었다.
세라는 꽤 오랫동안 씻었다. 따뜻한 물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었다. 씻고 나오자 상쾌해진 세라는 정은이 준 옷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입었다. 키가 비슷해서인지 사이즈도 딱 맞았다. 방금 바른 화장품도 꽤 좋은 제품이었는데 옷도 다 편하고 질이 좋은 것들이었다. 한창 머리를 말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은이었다.
“세라 씨. 일어났어요?”
“네. 잠시만요!”
옷을 잘 차려입은 오늘의 정은은 꽤 멋져 보였다. 그냥 가볍게 블라우스 하나 걸쳐 입은 것 같아도 그녀만의 성숙미가 풍겨 나왔다.
“와우! 역시 배우라 그런지 같은 옷인데 느낌이 다르네요. 내 옷 맞아?”
칭찬은 정은에게서 먼저 나왔다. 둘은 여자들 특유의 서로 예쁘다며 칭찬하기를 덕담처럼 주고받았다. 정은은 방에 불편한 건 없는지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밑에 정서 와 있는데 같이 내려가요.”
촬영장에서 본 세라는 화려한 옷을 입고 화장을 예쁘게 해도 그저 배우로 바라봤기에 당연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서 나타난 세라는 느낌이 달랐다. 화장도 한 듯 안 한 듯, 아직 덜 말린 머리에 캐주얼하게 입었는데도 말로 못 할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정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얘! 침 떨어지겠다. 예쁜 사람들 처음 봐?”
“…예쁜 사람‘들’은 아니고.”
“이게!”
정서는 2층에서 내려오는 세라를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은이 그런 정서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 말았다. 정은은 자기가 봐도 꽤 매력이 있는 여자인데 두 사람의 현실 남매 같은 케미에 웃음이 났다.
정서가 커피를 내오고 세라의 거취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저 할게요. 스탭.”
“괜찮겠어요? 여기 작가들이야 저랑 정은 누나가 확실히 얘기해 둘 거라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은데… 세라 씨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회사도 그렇고.”
정서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작가들이라 해도 일반인에 가깝고 뉴스 기사를 봤다면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작가들에게 확실히 해두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시선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정서는 그녀를 너무 여리게 보고 있었다. 세라는 이미 집 앞의 무리들을 뚫고 나올 때부터 전보다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제가 감당할 일이에요. 어제 작가님이 제안해 주셨을 땐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을 것 같아요. 오히려 받아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그리고 정서 씨가 걱정 말라면서요. 믿어요. 회사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어제와 달리 조금 강단이 생긴 듯한 말투였다. 정서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서가 채팅방에 남긴 공지를 보고 작가들이 거실로 모였다. 책방에 있을 정서가 이 시간에 작가들을 소집한 건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보라 작가. 뭔 일이래?”
“나도 몰라. 헤이, 한 작가님. 무슨 일이길래 그래?”
덩치와 보라가 작가들을 대변해 무슨 일인지 물어도 정서는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작가들은 웅성대다가 2층에서 내려오는 인기척에 조용해졌다. 작가들이 여기 다 모여있는데 누가 오는 건지 궁금한 눈치였다. 아까 대화를 끝내고 잠시 세라의 방에 가 있던 두 사람이 거실에 나타났다.
“어! 저분 혹시…”
세라를 알아본 몇몇 작가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렸다. 작가들을 진정시키고 정서가 세라를 소개했다.
“오늘부터 당분간 우리 문학관에서 스태프로 계실 배우 백세라 씨입니다. 이번에 제 소설 원작 드라마에 출연하시면서 친해졌어요. 같이 생활하게 되실 건데 빨리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부득이 이렇게 모이라고 했습니다. 일단… 어차피 알게 되실 거 미리 말씀드리자면 스캔들 기사는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어쨌든 바깥 상황이 좀 그래서 제가 모시긴 했는데 배우로 10년 넘는 경력을 갖고 계신 만큼 대본도 많이 보신 분이세요. 그 경험을 살려서 작가님들 작업하신 글이 어떤지 궁금하실 때 비평을 부탁드려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무튼 연예인이라고 어려워 마시고 편하게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도 보증해요. 기사 다 뻥이야.”
정서는 차분하게 말하는데도 말에 힘이 있었다. 옆에서 정은이 거들었다. 그런데 작가들은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정서가 아무리 설명을 잘했어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때 주변을 둘러보던 덩치가 말했다. 정확히는 다른 남자 작가들 네 명을 훑어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내 밑으로 다 이견 없지?”
“저도 찬성이요! 영신이 너 극본 쓰니까 부탁해도 되겠다. 얘.”
이번엔 보라가 손 들어 찬성했다. 보라 옆에 앉아 있던 영신이라 불린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는 정은과 눈을 마주치며 보일 듯 말 듯 찡긋거렸다. 아마 친한 두 사람이 미리 말을 맞춘 듯했다.
올해 문학관에 입주한 작가 중 각각 남성과 여성 작가들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동조했다. 그러니 다른 작가들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실 스캔들이 어쨌건 앞에 있는 사람이 연예인이건 말건, 작가들은 집필에 방해만 안 되면 상관없었다. 글에 미친 글쟁이들은 이런 사건은 자기 글에 아이템으로 썼으면 썼지, 뒤에서 작당하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은의 말대로 정서의 괜한 우려였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도 되죠? 지금 한창 절정 부분 쓰다가 나와서…”
한 남자 작가가 주변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밤이라도 샌 듯 짙은 다크서클 때문에 퀭해 보였다.
“근영아. 쉬엄쉬엄 해. 잠은 자야지.”
근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그처럼 별일 아니라는 눈치라 정서는 슬슬 끝을 냈다.
“자, 그럼 다들 찬성인 걸로 알겠습니다. 세라 씨 한마디 할래요?”
“아, 네. 저…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남아있던 사람들이 박수로 그녀를 반겼다. 덩치가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어유, 미인은 언제나 환영이죠. 에세이 쓰는 장선호라고 합니다.”
“나잇값 좀 해요. 이 아저씨야… 하여튼 쯧. 반가워요. 장보라예요.”
투덕거리는 두 명의 장 씨 작가들을 뒤로하고 세라는 다른 사람들과 돌아가며 인사를 나눴다. 그때 가장 어려 보이는 여작가가 손을 들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근데… 새 식구 환영 파티 안 해요?”
웹툰 작가인 혜리였다. 그 말에 사람들이 달력을 쳐다봤다.
“그러네. 오늘 금요일이네! 해야지 그럼! 한 작가 술사와. 얼른!”
덩치가 그 큰 손으로 옆에 있는 사람의 귀가 먹먹하도록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마침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작가들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정서는 정은, 세라와 함께 장을 보러 나왔다. 정서는 원래 마트보다 시장을 좋아했다. 지금은 세라가 앞으로 지내는 데 필요한 물품들도 사야 해서 조금 떨어진 대형마트로 향했다. 세라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사람들이 세라를 알아볼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정서가 권유했다. 세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적어 동네 편의점도 맨얼굴로 가곤 했었다. 그러다 이런 일로 갑자기 자신을 숨겨야 하는 상황을 좋아해야 할지 슬퍼할지 몰라 웃펐다.
정서가 식재료와 술을 사는 동안 정은은 세라와 함께 의류매장을 돌아다녔다. 세라는 가리긴 했어도 바깥을 돌아다니니 활기가 조금 돌았다. 여름옷 몇 벌과 속옷, 양말 같은 것들을 오로지 편의성만 보고 고르는 동안 즐겁기도 했다. 학창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배우가 되기 전의 세라는 유명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옷을 사는 걸 좋아했다. 여느 또래처럼 보세 옷 가게도 자주 갔다. 그래도 세라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서 옷을 사는 걸 더 좋아했다. 간호사였던 세라 어머니는 나이트 근무가 끝나고 오프인 날엔 항상 세라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얼굴 보기 힘든 엄마 대신 할머니 손에 자란 세라는 엄마가 쉬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일 때문에 돌보지 못해 미안했던 엄마는 갈 때마다 맛있는 것과 예쁜 옷을 사줬다. 그녀에게 마트는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어느덧 엄마보다 키가 커지고 나서도 세라는 엄마와 마트에 갔다.
데뷔한 후에는 단역이라도 옷을 아무거나 못 입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 생활이 10년이 넘으면서 이젠 비싸고 좋은 옷만 입는 게 적응됐다. 그러다 이렇게 오랜만에 마트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니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걱정하고 계실 엄마 생각도 났다. 아직 핸드폰을 켤 엄두가 안 났지만 늦지 않게 연락드리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많네요?”
계산대 앞에서 만난 정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서가 끄는 카트에 담긴 술과 식재료보다 세라가 챙겨 넣은 물건이 더 많아 보였다.
“여자한테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란다. 네 거 계산이나 해.”
추억을 너무 즐긴 세라가 민망한 듯 딴청을 부렸다. 그렇게 말하는 정은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금요일 파티를 맞은 보라와 정은은 신나 보였다. 정은은 입주 작가가 아님에도 금요일에 약속이 없으면 문학관 파티에 꼭 얼굴도장을 찍곤 했다. 그녀들을 필두로 소주파가 여섯 명으로 가장 많았다. 정서와 세라는 소맥을 택했다. 술이 약한 혜리와 근영은 맥주를, 덩치는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진짜 애가 갑자기 눈이 돌아가더라고… 진열대를 다 쓸어 담을 태세였다니까? 말리느라 혼났어.”
“언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술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발개진 세라가 말했다. 두 사람은 쇼핑하면서 친해져 말을 놓았다고 했다. 세라가 자꾸 “작가님. 이거 어때요?”라고 부르는 게 불편했던 정은은 “그냥 언니라고 불러. 나도 말 놓을게?”라며 호칭 관계를 정리해 버렸다. 술도 한잔씩 들어가니 없던 언니라도 생긴 듯 두 사람은 금세 친해져 있었다. 정은이 세라를 놀리며 장난을 치니 사람들도 연예인이라는 벽을 허물게 됐다. 덕분에 자리가 편해진 세라는 다른 작가와도 대화할 기회가 많이 생겼다. 친해지는 데는 술자리만 한 게 없었다.
“작가님은 와인 좋아하시나 봐요. 소주는 안 드세요?”
“소주는 질려서 안 마십니다. 회사 다닐 때 일주일에 세 번은 기본으로 마셨었거든요.”
세라가 덩치에게 물었다. 손에 든 와인 때문인지 그는 낮에 봤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덩치라고 더 많이 불리는 장선호 작가는 야구에 관련된 에세이를 썼다. 원래는 몸이 좋았는데 은행에 다니는 동안 받은 실적 압박과 잦은 회식 때문에 살이 많이 쪘다고 했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상관없이 그는 지금을 즐기는 것 같았다. 1년 전 덩치는 은행을 그만뒀다. 지점장이 되려고 기를 쓰고 올라간 친한 선배가 지점 실적이 바닥을 치자 2년 만에 희망퇴직 했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권고사직이나 다름없었다. 그 모습을 본 덩치는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자기 미래가 될 것 같아서. 그때부터 뒤늦게 좋아하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아구 보는 게 유일한 취미였던 그는 남들이 승진하려고 술자리를 찾아다닐 때 몇 년 동안 야구만 팠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구단의 장단점을 분석한 글을 올렸다. 십년 넘게 숫자만 만진 덕분에 복잡한 야구 수치도 금방 눈에 들어왔다.
성적이 안 좋은 팀은 감독의 문제인지 선수의 문제인지, 감이 떨어진 건지 멘탈이 문제인지. 그가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고 올린 글이 적중하기 시작하자 어느덧 구독자가 수천 명으로 늘었다. 나름 인플루언서가 된 그는 사직서를 냈다. 그동안 올린 글들을 정리해 에세이를 내고 나면 유튜브도 하고 언젠가 야구 해설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사십 중반의 나이에도 꿈이 생긴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우리 와이프가 고생이긴 한데 응원해 주더라고요. 은행 다닐 땐 스트레스 때문에 집에서도 예민하니까 우리 애들이 나 무서워하고 그랬거든… 딱 1년만 집중해서 책 내보겠다고 그동안 모은 돈, 퇴직금 다 와이프한테 주고 여기 와 있는 거예요. 억대 연봉보다 지금이 좋아.”
세라는 참 별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자기만의 사연이 있고 목표가 있었다. 당장은 아직 빛을 못 봐도, 꿈을 위해 묵묵히 도전하는 작가들이 내는 생기만으로도 이미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심 그런 그들이 멋지기도, 부럽기도 했다.
“세라 씨. 괜찮아요?”
부족한 안주를 만드느라 자리를 비웠던 정서가 다가와 물었다. 덩치와 대화를 나누고 잠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세라가 혹시 취했는지 걱정됐다.
“아, 괜찮아요. 잠깐 생각 좀 한 거예요. 이 정도로 취하진 않죠!”
“전엔 맥주만 마셔서 몰랐는데. 술 잘 드시네요.”
얼굴은 발개져 놓고 술 세다며 자랑하는 세라가 귀엽게 느껴졌다. 정서가 방금 만든 바지락 술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앉았다.
“이거 참, 메뉴가 해물이면 화이트 와인을 꺼내 와야 하나.”
“형님. 와인 세 병은 힘드실 거 같은데.”
“아아, 괜찮아. 저번에 키핑해 둔 거 있어.”
덩치는 이미 레드 와인 두 병째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를 보고 입맛을 다신 덩치가 술을 더 마시려는 걸 정서가 말리자, 그는 괜찮다며 술을 가지러 갔다.
“술은 저 형님이 진짜 세죠. 취한 걸 본 적이 없어요. 와인 세 병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신기해.”
“은행에서 진짜 많이 드셨나 봐요. 그런데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요리 진짜 잘하시네.”
“그냥…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세라가 국물을 맛보고는 맛있다며 정서의 팔을 계속 쳤다. 그녀는 웃을 때 옆 사람을 자꾸 때리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리액션이 좋다가도 계속 맞으니 안 되겠다 싶던 정서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파티는 즐길 만해요?”
“네. 재미있어요. 다들 얘기도 재미있게 하시고. 이런 술자리 오랜만이에요.”
세라는 정말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주변에 다른 민가가 없어 음악도 좀 크게 틀어놓고 있었다. 거기에 수다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작가들의 말소리로 시끄러운데도 정서는 이상하게 세라의 말이 잘 들렸다.
“다들 한 주 동안 글 쓰면서 쌓인 스트레스 푸는 자리에요. 올해 입주한 작가들이 유독 술도 잘 마시고 말도 많고 그러네요. 아무튼 재밌다니 다행이에요.”
“정말이에요. 하숙집 가보진 않았는데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아, 좋다.”
세라가 웃는 걸 보니 정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정은과 보라가 흐뭇한 표정으로 훔쳐보면서 킥킥댔다. 그때 와인을 갖고 다시 자기 자리로 가려던 덩치를 보라가 붙들고 자기 테이블로 끌고 갔다.
덕분에 두 사람은 좀 더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