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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사이사이가 부드러워진다.

'충전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

by 로마 김작가

아이들과 전시를 보고 나오니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삐---- 기분 나쁜 경고음이 높고 날카롭게 울렸다. 계기판에 모든 불이 들어와 불안을 부추겼다. 시동을 끄고 다시 키를 넣고 돌려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뒷 좌석의 두 아이가 불안한 듯 운전석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엄마, 라라 이모에게 전화해 봐." 도움을 요청할 사람으로 아이들이 라라 이모를 떠올렸나 보다. "라라 이모가 온다고 뭘 할 수 있겠어......." 몇 번 더 시도 끝에 갑자기 라디오가 켜지더니 부릉... 시동이 걸렸다. 우선, 이 지역에서 벗어나 집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서 그랬나 보다... 이제 괜찮아..." 하고 운전은 하는 내내 이러다 도로 한가운데에서 시동이 꺼지면 어쩌지? 불안을 떨치기 힘들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주차헬인 우리 동네를 한 20바퀴 돌고 있는데 겨우 차 한 대가 빠졌다. 마음에 쏙 드는 주차자리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켜고 끄고 켜서 다시 작동이 잘되나 몇 번을 확인하고 집으로 올라갔다. 정신없는 한 주가 지나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요일의 대미가 장식된 밤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며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유난스러운 로마의 날씨는 올해도 여전하다. 이번 주는 종일 비가 내릴 모양이다. 안 그래도 학교에 가기 싫은데 비까지 내리니 더 가기 싫다는 중 2를 배웅하고 우산을 고르느라 몇 분이나 허비하는 초4와 등교를 하는데 그 사이 비가 그쳤다.


아이 둘 모두 등교를 마치고 다시 차로 향했다. 시동을 켜니 삐----- 어제와 동일한 경고음이 역시나 울려 퍼졌다. 집 근처 카센터에 가니 알아서 차를 가져갈 테니 차키를 두고 가란다. 집에 돌아와 창 밖으로 차를 바라보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차는 그 자리 그대로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엄청난 비였다. 못 참고 전화를 했다. "12시 전에는 가져갈 거예요."라는 답을 듣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올리브유 패킹이 늦어져서 주말 내내 마음이 조급했다. 농장에 전화를 해서 힘들겠지만 제발 좀 더 힘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힘이 드는데 더 힘을 내라고 말하는 것이 미안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농장에서도 적은 인원으로 애쓰고 있는 걸 알고 그들도 애타는 나의 심정을 안다. 이해해 달라는 서로의 말속의 이해의 지점은 달라도 그 안에 담긴 서로의 감정은 닮아있다. 올리브유와 농장의 상황을 담아 올리브유를 구입한 고객들에게 장문의 메일을 쓴다. 쓰고 발송하고 쓰고 발송하고 창 밖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차는 여전히 그 자리다.


12시 전에는 차를 가져간다고 했다고 이미 12시는 지난 지 오래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도의 학교다. 전화를 받으니 담임 선생님이다. "어머니, 오늘 개별 면담날인데 오지 않으셔서....." 11월은 이탈리아 학교 면담 기간인데 오늘이 이도의 담임과의 면담이었던 것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예약을 하시고 오셔야 하는데 12월 초, 오후에 시간이 남아 있으니 학교앱으로 바로 예약하시면 되어요."


"네네.. 죄송합니다. 제가 첫째 아이 면담만 표시해 두고 이도는 깜박했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뭘까... 좀.. 답답했다. 못하겠다. 그런 감정이라기보다... 비워낼 순간이었다.


내 몫을 감당하기 위한 마음의 그릇에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선 무언가는 내보내야만 한다.

그것이 울음의 형태였을 뿐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눈물을 닦고, 다시 메일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지난주 모든 올리브유 주문을 마감하고 꼬박 하루를 앓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올리브유를 전한 지 6년 차인데도 여전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까무룩 침대에서 잠이 쏟아지면서도 아이들 등하교와 검진 등 해야 할 일을 놓을 수는 없었는데요.

중 2가 된 첫째가 어느새 청소년이 되어, 동생을 픽업하고 저녁을 차려주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게 시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처음 올리브유를 전하는 일을 시작할 때 2,000년 올리브 나무아래 쏙 들어가던 쪼그만 꼬마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습니다. 6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큰 시간이구나 실감이 났습니다.

덕분에 완전히 기운을 차리고 이렇게 비 내리는 로마의 월요일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엔 갑자기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차가워진 날씨 때문인지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이 된 것 같아 곧장 서비스센터에 차를 맡겼습니다. 예전 저의 메일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농장에서 올리브유 패킹이 늦어져 발을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때의 메일을요. 조급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시간이 쌓이며 배운 것은, '충전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진행상황 또 메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충전된 월요일이 시작되셨길 바랍니다.

비 내리는 로마에서 로마가족 드림 "


이도를 픽업하러 갈 시간이 되자. 비가 그쳤다. 이도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이도, 이도, 엄마가 오늘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가 정말 운이 좋은 거야. 아침에 이도 데려다주고 엄마가 다시 차 시동을 거는데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너무 감사한 일이잖아. 어제 거기에서 차가 시동이 안 걸렸음, 어쩔 뻔했어? 그리고 도로에서 멈췄으면? 그런데 우리가 무사히 집에 왔지? 주차도 잘했지? 카센터가 바로 집 앞에 있지? 다시 생각해 보니까 완전 행운인 거야!!! 심지어 오늘 아침에 학교 갈 때 비가 안 왔지? 학교 끝나니까 또 비가 안 오지? 그리고 더 대박은 오늘 엄마가 알리체 선생님이랑 면담인데 깜박했거든? 그런데 12월 첫 주에 바로 예약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거야!! 바로 다시 예약했어! 대박이지?"


"와... 진짜 행운이다. 사실 어제 나 차 타고 집에 오는데 엄청 걱정했거든, 차가 멈출까 봐. 엄청 운이 좋네!"


"그런데... 카센터에서 차를 가져간다고 했는데... 아직 안 가져갔어...."


"엄마, 그래도, 월요일이라서 운이 좋다! 우리 토요일 한글학교 갈 때까지 차 탈일 없잖아! 그때까지 고쳐주지 않을까?"


집에 돌아오니 다시 비가 내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이안과 이도와 테라스에서 주차된 차를 내려다보며 언제쯤 차를 가져가려나... 하고 보고 있는데 우리 차에 불이 들어오더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이 말했다.


"우리 차 누가 가져갔는데? 카센터 맞아? 그냥 가져가는 거 아니야?"

"설마... 근데... 차가 움직이네? 저 사람은 어떻게 시동을 건 거지?"


아이들과 카센터로 달려갔다. 오피스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카센터 사장이 우릴 보더니 전화를 끊고 "어어 네 차 우리가 가지고 있어, 내일 아침에 점검하고 전화 줄게." 하고 말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묻지도 않는데 내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어제 시동이 안 걸리는데... 집에 오는데 시동이 꺼질까 봐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이렇게 점검을 받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고..... 내가 진짜 걱정이 되어서...... 주저리주저리.... 어쩌면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도가 말했다.


엄마! 엄마! 너무 좋다.
저 아저씨 너무 친절해.
나 이탈리아에서 처음 봤어.
전화하다가 끊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
저 아저씨 처음엔 엄청 불친절해 보였는데,
아니었어.
너무 친절했다.
그치?


"맞네, 맞네, 그렇네, 전화하다가 우리랑 이야기했네. 아니 어쩜, 우린 이렇게 운이 좋지? 아마도 이도의 이름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복이랑 행운이라는 뜻이 있어서 우리에게 항상 행운과 행복한 일이 함께하는 것 같아. 그치?"


다음 날 아침, 전 날 보낸 메일의 답이 도착했다.


"이렇게 메일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태리 페루지아와 로마에서 10여 년을 살았던 제 친구는 이태리에서는 한국의 속도가 그리웠는데 한국에 오니 이태리의 여유가 그립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삶이 더 낫다기보다는 서로의 추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같으나 가는 길이, 방법이 다를 뿐인데, 어디서나 삶은 우리에게 시간을 통해 지혜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가끔 이안이와의 대화를 올려주시는 쇼츠를 통해서도 많이 배웁니다. 그런 의젓하고 깊은 생각을 하는 친구의 부모님은 어떤 분 일지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

김작가님과 가족들 모두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목이 한 뼘은 길어진, "


새벽부터 올리브 농장의 코라도 아저씨가 문자가 도착했다. 사소한 하나하나 상황을 공유해 주고 작은 결정도 꼭 상의해 주어 고맙다는 답을 보낸다. 매년 연말이면 어김없이 긴급하게 올리브유 운송건을 맡기는 연락에도 올리브유 운송 대작전이 연말 빅이벤트라는 한국의 파트너의 문자도 도착했다.


전화밸이 울렸다. 카센터다. 자동차의 배터리가 수명을 다해 교체하고, 마침, 매년 해야 하는 자동차 정기점검 때라고 알림이 떴으니 모두 진행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오늘 저녁이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고 했다.


와, 너무 좋은 타이밍이었네요. 완벽해요. 이렇게 신속하게 처리해 주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모터에 문제가 있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 모두 진행할게요!


나아간다.


예전에는
비워내는 것도 애가 쓰이고
감당하는 것도 힘이 부치고
충전하는 것도 시간이 걸리고
나아가는 것도 갈팡질팡 하더니...


과정의 사이사이가 조금은 담백해졌다.

결국은 모든 것이 행운임을 알기에,

경험의 시간이 쌓인다는 것은

과정의 사이사이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일까?


비워내고,
감당하고,
충전하고,

단단하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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