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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네오 Sep 12. 2020

그 시절 추억이 우리와 이별하는 방법

안녕 디지몬


그 시절 추억이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건 디지몬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디지몬 어드벤처'


저녁 시간만 되면 잊지 않고 챙겨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을 서성였다.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사실 좀 놀랐다. '이렇게까지 기억이 생생한데 정말로?' 얼마나 몰입해서 봤으면 지나간 세월조차 잊게 할까.


때는 바야흐로 2000년, 애니메이션계의 양대산맥이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꾸욱 붙잡고 있었다. 월요일과 화요일엔 <디지몬 어드벤처>가, 수요일과 목요일엔 <포켓몬스터>가 방영되어 평일 오후의 행복을 보장해줬다. 방송사도 방영일도 달랐기에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불상사는 없었으나 '포켓몬이 좋아, 디지몬이 좋아?'는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그리고 난 항상 포켓몬 편이었다. 디지몬이 좋다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세운 논리는 간단하다. 포켓몬은 죽지 않지만, 디지몬은 죽는다. 가장 개인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은 '재밌어서'였지만,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확실한 동기가 필요했다. 전투에서 패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디지몬이 하얀빛이 되어 먼지처럼 사라지는 모습이 싫었다. 영원한 헤어짐과 소멸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죽음에 순응하는 어른의 길은 지금도 힘들지만.


머리가 자란 뒤에 접한 두 애니메이션은 이전과 크게 달랐다. 포켓몬스터가 안전한 여행이라면, 디지몬은 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에 가깝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의 존재감에서부터 확연히 차이가 난다. 포켓몬스터의 '로켓단'은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해 에피소드에 귀여운 위기를 불어넣는 감초 역할이지만, 디지몬의 '사천왕'은 나왔다 하면 우리 편이 죽거나 자신이 당하는 선택지밖에 없는 극복의 대상이다. 오죽하면 디지몬을 보면서 오늘은 평화로운 에피소드가 나왔으면 하고 바랬을까.


하지만 그게 디지몬의 진정한 매력이었다. 정말 위기다운 위기를 겪으며 '선택받은 아이들' '파트너 디지몬'은 성장하고 진화했다. 용기, 우정, 사랑, 지식, 순수, 성실, 희망, 빛의 문장을 테마로 아이들 각자가 내면의 힘을 깨닫고 디지몬이 진화하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겐 어떤 문장이 있을까' 상상해보는 재미도 빠트릴 수 없다. 지금에 와서 디지몬을 좋아하게 된 건 치열한 현실 속에서 나도 아직 성장하고 있다고,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 인연>에서는 디지털 세계를 구한 아이들의 10년 뒤를 다룬다. 초등학생이었던 주인공들은 성인이 됐고 대학교 신입생, 취업준비생, 의대생,  CEO 등의 모습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로라가 관찰되고 세계 곳곳에 이상기후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디지털 세계에 있어야 할 디지몬이 현실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그 원인을 파악하던 중 파트너 디지몬의 진화가 풀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어른이 된 아이들과 디지몬은 앞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래의 가능성이 줄어들면 파트너 디지몬과의 계약이 해제된다'라는 설정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다. '어른이 되면'이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파트너십이 끝나는 걸 보면 '미래의 가능성' 혹은 '선택지'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디지몬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선택받은 아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놀란 건 그들뿐만이 아니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오랜 팬이자 관객들에게 이별을 준비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디지몬의 관계는 가능성으로 맺어져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각성했을 때 디지몬은 진화하고 밝은 미래에 가까워진다. 어른이 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하게 되면 디지몬의 존재 의의는 사라진다.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 헤쳐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추억을 추억으로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지는 때다.


추억에 젖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중한 이의 부재, 연인과의 이별, 조직에서의 탈퇴 등 대상과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빠져나오기 위해 더 많은 의지와 결심을 필요로 한다. 제때 빠져나오지 못한 이의 모습을 보았는가? 계속 남아있으려 발버둥 칠수록 대상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결국 영원히 다가갈 수 없게 된다.


현실에서 만족을 찾지 못했을 때 추억은 훌륭한 도피처가 되어 준다. 나도 종종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도피 기간이 길어질수록 절망은 깊어지고 무기력은 길어진다. 잠시 숨을 수는 있어도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기에 우리는 추억을 잘 이용해야 한다. 헤어질 때를 아는 것추억을 추억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 과거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미래로 도약할 수 있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우리에게 추억으로 저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정든 추억과 헤어지는 건 슬프고 힘들지만 그 과정을 이겨내야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시절 추억이 우리와 이별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답다.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몰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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