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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Feb 09. 2016

힐링과 킬링 사이에서

#39 김민수의 '소소한 풍경 이야기'


 이정표를 의심하는 이들이 없듯이 힐링 선생들과 설교자들은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가?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방관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무관심하면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것은 교인들에 대한 기만이다. 


권력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강요당해야 함에도 '오직 말씀만!'을 외친다면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사이비 예언자에 불과하다.


어둠에 빛을 비추어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게 하는 일이 힐링 선생과 설교자들의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힐링 선생들의 문제는 이런 것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힐링의 최적화, 참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인내할 수 있도록 아편을 주입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맘몬이 한 개인을 온전하게 착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힐링 선생들은 개인에게 부당하게 행해지는 모든 것들을 개인 스스로 감당하게 함으로써 사회구조악에 눈 감게 하고, 그것과의 싸움도 개인적인 싸움으로 치부함으로써 마침내 힐링이라는 아편에 취한 이들은 킬링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힐링 선생들과 설교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힐링 선생들이나 설교자나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몇몇 개인적인 사례들을 평준화된 사례인 듯 강요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을 '믿음이 없다'거나 혹은  '한번만 더 참으면 된다'는 식으로 매도한다는 점이다.  


이런 설교자와 힐링 선생들은 사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므로 해석할 능력도 없다.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늘 편향적이고 맘몬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선이므로(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그 희생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에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이들이 왜 분노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보다 그들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하는 짓이다.


힐링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편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처방을 하려면 사회구조의 문제를 직시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아편에 취한 이들은 이런 시도를 불경한 것으로 바라보며, 더욱이 분단의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워하도록  훈련받았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차별하고, 그것을 넘어서 미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맘몬을 위한 힐링은 완성된 것이며 힐링을 받아야 할 이들은 킬링에 도달하게 된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 두루뭉실 허상을 쫓게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힐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파괴하는 교설들은 폭력적인 언어로 오지 않는다. 아주 달콤한 말로, 그럴싸한 말로 우리를 잠식한다. 천사의 탈을 썼건만 스스로도 보는 이들도 그를 천사라고 착각하는 데서 불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를 속이는 일, 그것은 너무 쉬운 시대다. 


이 시대 속에서 거짓 힐링 선생이나 거짓 설교자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일이며, 이 사회가 정의라고 각인시키려는 것들을 의심해 봐야 하며, 그런 논리를 깨뜨리기 위한 학습과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아니오!"할 수 있는 용기다.


이 시대에 가장 측은한 사람은 힐링 선생과 거짓 설교자들의 감언이설에 그들을 위해 주머니를 여는 이들이 아닐까?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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