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感情)으로 가도록 합시다!
정서 또는 감정은 심리학에서 의외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분야다. 현 심리학의 주제는 인지심리학에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주의, 지각, 학습과 기억에서부터 문제 해결, 의사 결정, 추리와 추론 등의 인지 과정, 범주화와 상징, 창의성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정서는 정서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정서이론, 그리고 정서를 생존을 위한 반응으로 보는 기본정서 이론 정도가 전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서양에서 역사가 깊다. 근대 이후, 이성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으로 꼽히면서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는 것, 열등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현대 심리학의 주제가 인지 쪽으로 편향된 데에는 이같은 지적 전통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심리학에서 정서(또는 감정)에 대한 연구가 별로 없는 또다른 이유는 이것이 워낙 인간의 기본적인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서(또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수준으로 지각되고 또 표현된다. 때문에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논의의 차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심리학의 고전 정서이론 중 하나인 James-Lange이론은 정서의 생물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Shachter와 Singer의 2요인이론은 경험의 인지적 해석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또한 사회학이나 문화심리학이 관심을 갖는 정서(또는 감정)의 또 한 측면은 사회적 교류와 의사소통이라는 기능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우선 이 복잡한 개념의 용어를 통일하고자 한다. 어떠한 경험이 불러일으킨 마음..이라는 뜻의 단어는 심리학에서 주로 통용되는 정서(emotion)라는 용어를 제외하고도 정동(affect), 기분(mood), 느낌(feeling), 감각(sense) 등이 학술적으로 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다.
보통 학술적으로는 정서(emotion)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emotion의 사전적 의미는 분노나 증오, 사랑과 같은 강렬한 감정을 뜻한다. emotion은 보통 정서(情緖)라는 말로 옮겨지는데 한자어 정서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라는 뜻이다.
정서의 보편성을 강조해 온 심리학의 전통에서, 정서(emotion)는 진화과정에서 획득된 특정 자극에 대한 생물학적 반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서는 정서를 느끼는 주체에 어떤 움직임(motion)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포는 나를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반응으로 나는 속히 그 대상에게서 도주하여야 생존할 수 있다.
정동(affect)은 감정의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뜻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사건의 영향으로 일어난 (감정적) 변화에 가깝다. 심리학자 리사 베럿은 정동(affect)을 정서(emotino)과 비교해서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단순한 느낌’으로 정의한다. 정동의 원인은 정서(emotion)에 비해 다소 덜 명확한 편이며 감정의 주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정서(emotion)와 정동(affect)이 일시적인 느낌이라면 기분(mood)은 이유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비교적 오래 지속되는 느낌을 의미한다. 기분은 크게 쾌-불쾌로 지각된다(기분 좋다-기분 나쁘다).
느낌(feeling)은 어떠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경험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진 다음일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일 수도 있다. 원인과 상황이 분명한 공포, 분노, 슬픔 등을 유발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애매모호한 상황에서의 분명치 않은 느낌인 경우에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반추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감각(sense)은 본래 외부자극을 생물학적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단계를 의미하지만, 통제감(sense of control)이나 자기감(sense of self) 등 감정과 관련해서, 주로 학술적인 맥락에서, 종종 쓰는 말이다. 감각은 어떠한 자극 또는 경험이 지각된 순간의 느낌 자체를 의미하며 아직 그 경험에 대한 본격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라 볼 수 있다.
이렇듯 감정은 그 기원과 생물학적, 심리적 상태에 따라 다양한 측면이 있고, 또 쓰이는 맥락이 일상적이냐 학술적이냐에 따라서도 다르게 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하여, 이 책에서는 감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감정(感情)이란 느끼어 일어난(感) 마음의 작용(情)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자극이나 상황에 감응하여 일어난 경험이라는 측면과 그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을 포괄적으로 나타내어 주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반응과 진화적 동기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감정은 자극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주체(self)의 입장이 개입되는 주관적 경험이다. 따라서 경험을 해석하는 주체의 주관성(subjectivity)이 강조되며 여기에서 개인차와 문화차 등 해석이 다양성이 비롯된다. 또한 지속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기분(mood)이나 주체가 개입하기 전의 일시적 상태를 묘사하는 느낌(feeling)이나 감각(sense)에 비해 주체가 경험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과정을 포괄하는 감정이 보다 적절한 용어라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