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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 현상의 특징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다종교 공존

by 한선생

한국의 종교 현상 중 가장 특이한 점은 종교들 간의 관계다. 일부 성직자들과 신도들 간의 갈등이 있으나 한국에는 종교 갈등이 놀랄 만큼 적다. 크리스마스에 절에서 성탄법회가 열리고 부처님 오신날 성당 신부님이 축사를 하시는 나라다. 1500년이 넘는 역사의 불교와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전통이 있으나 딱히 국교라 할 만한 종교가 없으며 한 종교의 세력이 다른 종교보다 특별히 강하지도 않다.


2021년에 조사된 한국의 종교별 인구 비율은 무교가 50%에 달했고,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5,657천 명11%, 기타 종교 2%로 나타났다. 종교인들 중에서는 개신교와 불교, 천주교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이들 종교가 다른 소수 종교들을 탄압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국 종교계를 보통 5대 종단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외에도 원불교, 천도교가 포함되며, 이 외에도 유교, 대종교, 무속인들도 참여한다.

107770_23200_633.jpg 7대 종단 대표 모임

또한 종교의 자유도 높은 수준에서 보장된다. 개인 수준의 신앙활동에는 전혀 제한이 없으며 교단의 포교도 자유롭다. 한국의 번화가에서는 전통적인 개신교의 전도활동 외에도 미국의 몰몬교, 일본의 천리교와 창가학회, 우리나라의 증산도, 대순진리회, 통일교 등 여러 나라에서 기원한 신흥종교들의 포교 활동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문화콘텐츠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최근 흥행한 <파묘>에서는 잘못 쓴 묫자리에서 비롯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MZ세대 무당(무속)과 지관(풍수사), 개신교 장로인 장례지도사가 협업하는 모습을 보였고, 같은 감독의 전작 <사바하>와 <검은 사제들>에서도 무속인과 신부, 목사와 스님들의 협업이 매우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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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한국의 종교계는 예로부터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종교와 교파를 막론하고 한데 모여 한 목소리를 내 왔다. 저 멀리 임진왜란 때의 승병들로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그러했고,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그러했으며, 현재에도 중요한 이슈가 있으면 5대 종단에서 성명을 발표하거나 합동기도회 등으로 여론을 이끈다.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이러한 다종교 공존의 모습은 세계적으로 몹시 드문 일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를 이유로 한 수많은 전쟁과 학살, 분쟁과 차별이 있었고 세계의 어떤 곳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다고는 하지만 소수 종교가 주류 종교와 같은 정도의 위상과 발언권을 갖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종교의 어울림은 한국의 종교적 심성과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하늘을 섬기고 풍요를 비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통적인 신앙 위에 외부에서 유입된 종교들을 융합해 왔다. ‘하늘님’은 제석님이기도 했고 천주님이기도 했으며 한울님, 하느님/하나님이기도 하다. 어차피 본질은 하나요 그 모습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 나의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신앙의 대상과 형식은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불제석.jpg 불교화된 삼불제석도

한국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예로 개신교가 전래되던 시기에 있었던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구한말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한국의 전통 종교를 연구한 끝에 무당을 전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의 민중들에게 가장 깊이 뿌리내린 무속의 사제들이 예수를 믿으면 자연스럽게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선교사는 큰 무당을 찾아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설명했고 무당은 크게 감복해서 드디어 예수를 믿기로 했다. 크게 기뻐하며 돌아간 선교사가 얼마 후 다시 무당을 찾아갔을 때 무당은 계속해서 무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실망한 선교사가 무당에게 왜 아직도 무업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무당은 신당에 모셔놓은 예수님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예수님도 믿소.”


만신(萬神)이라 할 만큼 수많은 신들을 모시는 무당의 입장에서는 힘있고 능력있는 신 한분을 더 모시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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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종교간 화합에는 한국인들의 집단(우리)에 대한 생각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범주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범주화하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내가 남자라는 범주로 나를 인식하면 여자들과의 차별점이 강조되고, 충청도 사람이라는 범주로 나를 인식하면 타 지역 사람들과 나의 차이를 찾는 것이다.


자신을 특정 종교의 신자로 범주화하는 순간 그 종교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집단에 대한 편향과 외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범주를 자의적으로 쉽게 바꾸는 경향이 있다. 바로 ‘우리’라는 범주다.


한국인의 우리는 확장된 자기(extended self)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즉, 내가 속한 집단을 자기 자신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종교인들이 종교도 종파도 다르지만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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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의 어울림에 대한 생각을 들 수 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조화(어울림)는 서양의 조화(harmony)나 일본의 와(和) 개념과는 다르다. Harmony는 서양음악의 화음처럼 각자의 개성을 가진 개인들이 어떤 목표를 위해 일시적으로 정해진 역할에 따르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화음에 개별적 악기의 자율성은 허용되지 않듯, 집단이 조화를 이루려면 개인은 자신의 표현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가치로 이어지는 일본의 와(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의 어울림은 개인의 표현을 인정하는 조화다. 화음이 없이 악기의 개별적 연주가 어우러지는 한국의 음악, 강렬한 보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어내는 단청이나 한복의 색감에서 한국식 어울림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아무리 미약한 개인이나 소수여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때로는 이러한 모습이 혼란스럽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비춰질 때도 있지만, 이는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고 힘없다고 무시당하기 싫은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서로 다른 종교와 종파, 종단이 어우러진 한국의 종교계는 갈등과 혼란으로 점철된 이 다양성의 시대에서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존, 즉 함께 사는 세상의 모델이 되어줄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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