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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Jan 22. 2020

누가 내 밥상을 차려주겠어요  


버스를 타면 운전석 바로 에 달려있는 모니터에서 여러 가지 방송이 나온다. 선진국과 비교해도 월등히 낮다는 한국의 버스요금부터 시작해서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는 헤어 픽서 광고, 때를 막론하고 식욕을 자극하는 요리 레시피, 부작용에 대한 언급은 아주 깨알만한 글씨로 아래에 흘려놓은 성형외과 홍보... 그중에서 요즘 내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명사 인터뷰인데, 소위 성공한 반열에 오른 우리 사회의 명사들이 나와서 무명시절과 슬럼프,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중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성공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내 밥상 안 차려줘요. 내가 차려야지." 거참 섭섭하고 서늘한 말이네 싶었다.



차려진 밥상

자취 10년 차쯤 되면 누군가 나를 위해 차려주는 밥상은 판타지라는 걸 알게 된다(자취인 대상으로 인기 히어로 순위 조사를 하면, 분명 마블을 제치고 우렁각시가 1위일 텐데). 배는 고픈데 기운이 없다 그대로 굶거나, 지친 몸을 일으켜 뭐라도 뒤적거려야 한다. 자취란 곧 몸을 움직인 만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음식이든 청결이든 그 뭐든.


밖에서 사 먹는 밥은 싫고, 집에서 따끈한 밥 한 숟갈 먹고 싶은 퇴근길의 지친 내 마음을 밥솥이 자동적으로 간파하고는 내가 집에 돌아올 시간 맞춰 밥을 뿅 하고 지어놓을 리가 없다. 2020년에는 로보트가-로봇이 아니라 로보트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밥도 지어주고 우주관광도 가능해질 거라고 했는데, 2020년의 로보트는 청소만 겨우 한다. 얼굴도 있고 팔다리도 달려있어서 더러운 곳 찾아다니며 박박 쓸고 닦는 게 아니라, 그저 집안 여기저기를 밤거리 쏘다니듯 배회할 뿐이다. 2020년의 밤거리엔 낡은 공중전화가 드문드문 박혀있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밤하늘의 별처럼. 아무튼 뭐 우리들의 2020년은 여전히 그렇고, 나를 위해 밥을 차려줄 사람은 여전히 나뿐이라는 말이다.


엄마와 함께 살 때는 밥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밥솥 가득한 밥의 따끈함이 얼마나 간곡한 것인지는 짐작도 못했다. 여느 주부들처럼 나의 엄마도 '밥하러 집에 가야 한다'는-82년생 김지영이 무척 싫어할-과 함께 자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에 와서 사명처럼 밥을 지었다. 지금은 서너 달에 한번 고향에 내려가는데,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밥솥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늘 따끈한 밥이 있는 풍경이 생경하고 또 신기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차려야 할 밥

사전적 의미의 밥이든, 밥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생계이든 '밥'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삼키면, 목구멍이 따듯해지고 곧 속이 뜨끈해오다 마음이 따끔해진다. 일어나 밥 한술 뜨곤 시커먼 새벽 속으로 사라지던 아버지의 등을 파먹고 자 나도, 이제는 매일 아침 약 서른 개의 알람을 간신히 떨치고 일어나 아침을 향해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어제 누군가와 의도치 않게 나의 밥상, 그러니까 내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긴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상대방의 주 요지는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였다. 겨우 일어나 씻고 나가기 바쁜 내게 아침식사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데, '아침 점심 저녁을 잘 챙겨 먹으라'는 얘기가 한 마디도 안 통하는 외국인과의 대화 같았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선 나를 생각해서 한 말인걸 알지만, 이왕 생각한 김에  좀 더 자세히 해줬으면 싶었다.


통화 내내 언짢게 듣고 있던 나는 수화기 너머로 '시래기가 장 활동에 좋다' 말을 듣고는 '이 무슨 시래기 같은 소리인가'싶어 고요히 극노했다. 시래기가 몸에 좋은걸 누가 모르나. 금요일 퇴근 무렵이면 사무실 직원들의 얼굴이 일주일치 누적된 피로로 벌겋다.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때맞춰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라는 건강지침을 몰라서 사람들이 골골거리는 게 아니다.


당연히 수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자취를 안 한다. 퇴근하면 언제나 따뜻한 밥이 있고, 먹고자 하면 잘 차려진 아침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세탁기 가득 쌓인 빨래도, 건조대에 시래기처럼 축축 늘어진 채 말라가는 빨래도, 요일 맞춰 잊지 말고 해야 할 분리수거도, 개수대에 가득한 설거지도 모두 그의 일이 아니다.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으라는 그 말이, 시래기가 몸에 좋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 화가 났나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몹시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이때문이다. 내가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섭섭하고 서늘하게 느꼈던 '아무도 내 밥상 안 차려준다'는 그 말과 닿아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순진무구한 발화자의 의도를 있는 대로 꼬아들은 건 나다. 잘 마른 시래기처럼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마른 내 마음이 시래기 부서지듯 툭툭 부서진다. 갓 지은 따듯한 밥에 매콤한 시래기 전골을 척 걸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내 상황을 잘 안다.'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의 그렇게가 나한테는 최선이라는 걸 아마 상대방은 꿈에도 모르겠지.


내 밥상은 아무도 안 차려준다.

내 상황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서늘하고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참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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