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빠가 건네준 책 - 원망을 지나 연결로
어느 날 밤 지친 몸과 정신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하나의 책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검은색의 책에 밝은 노란색의 띠지가 둘러져있는 책.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무슨 책인지 살펴봤다. 책의 노란 띠지에 검은색 네임펜으로 굵게 쓴 메모가 있었다.
‘아빠 先讀後 (선독 후) 수연에게’
한강 작가님의 강연문, 시, 에세이 등을 엮은 <빛과 실>이라는 책이었다. 그도 그럴게 요즘 아빠는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몰아서 읽는 것에 빠져있었다. 아빠가 먼저 다 읽은 후 나도 읽으라고 두신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책을 책상에 두고 서서 주섬주섬 네임펜을 찾아 뚜껑을 열고 띠지에 메모를 하는 아빠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선독 후’는 꼭 한자로 쓴 후에 뿌듯해하는 모습도 머릿속에서 상영되듯이, 눈에 선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아빠는 영원한 문학 소년이고, 책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다정하고 이지적인 부녀사이 같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나는 아빠와 가깝지 않다. 마음속에서 항상 아빠는 저 멀리 손톱만 하게 보이곤 했었다. 아빠와 거리를 좁히는 것 대신에 나는 아주 먼발치에 서있었다. 아빠를 향해 나있는 길, 그 속에서 내 두 발은 언제나 요지부동이었다.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장벽들이 있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아빠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 중 많은 부분을 썼다. 이 말은 내가 어려서부터 머리가 클 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아빠였다는 뜻이다. 가장 가깝고도 질긴 ‘혈연’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난이도를 꽤나 높이는 일이었고 나는 그것에 너무 지쳐있었다.
아빠는 입체적이고도 복잡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문학을 좋아했지만 사업을 했다. 아빠는 마음이 아주 여렸지만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폭력을 썼다. 아빠는 항상 사명감을 가지고 이상적인 세상을 그리고 꿈을 꿨지만 그 세계로부터의 간극을 느낄 때마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간극을 느끼는 순간은 아주 잦았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걸고 사업에 미쳐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을 것이다. 한창 그 과정을 통과하던 시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아빠를 감당할 수 없어서 아빠의 손을 놓았다. 아빠는 그대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멀리 가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빠가 생존에서 자유로워진 어느 시점쯤이었을까 그는 자신과 나의 위치를 마주했다. 거의 25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멀고 먼 그 거리를 느꼈던 것이다. 아빠와 어쩌다 마주쳐도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일상을 채우는 시답지 않은 대화였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언제나 거리를 확인한 채 끝났다. 그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그는 그의 세계를, 그리고 나는 나의 세계를 살았기에. 그리고 그 세계를 분리하는 것은 원망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런 아빠가 몇 년 전부터 찾은 접점은 책이었다. 아빠는 문학을 꿈꿨었지만 가난했고, 그런 아빠가 생존하기 위해 아득바득 사업을 하며 번 돈으로 공교롭게 나는 국문학과를 갔다. 어떤 날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아빠는 무척이나 감동한 듯했다. 마치 어렸을 때 자신의 꿈을 이룬 것처럼. 그리고 나에게서 한강 작가님의 시집과 소설들을 실컷 빌려가서 읽고는, 밥을 먹을 때마다 눈을 반짝이며 작품에 대한 말을 늘어놓았다.
“읽으면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주 깊게 들어가더구먼.”
책을 보고 감명받은 여러 이야기들을 신나서 산만하게 늘어놓으면 내가 아주 작게 호응하는 식이었다. 아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한동안 나는 그의 만족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 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아빠가 준 책에는 언어를 통해 타인들과 연결되는 것, 극심한 고통만큼 결국 사랑이 살아 숨 쉬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쓰여있었다. 아빠가 먼저 읽은 그 책, 그 책 위에 적힌 메모. 책을 먼저 읽으며 남긴 작은 흔적들 - 이를테면 종이의 작은 구겨짐을 보면서 아빠는 결국 이 책을 통해 나와 연결되고 싶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책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사랑하는 일은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 그렇기에 극심한 고통은 사랑을 반증하고, 얼마가 되어도 연결되기에 늦은 시기란 없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아빠는 저 멀리에서 조금씩 다가온다. 아주 미안한 얼굴을 하고 쭈뼛쭈뼛, 그리고 그나마 나와의 접점을 찾아낸 책들을 두 손에 가득 들고.
나는 얼마간 고민을 한다. 증오라는 감정을 지나서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 이런 것들은 아직 너무 어려우니까, 그 단어들을 모두 지나 작은 연결이라는 것을 나는 선택한다.
“아빠, 준 책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