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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14. 2016

짝사랑을 하면 고장나는 이유

응답하라 김정팔팔


소위 '응팔'로 불리는 드라마 <응답하라1988>은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이 개최되는 1988년을 시작으로 쌍문동의 한 골목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애환 그리고 당시의 삶에 존재했던 따뜻한 감성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전달합니다. 사실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니라서 지인의 극성으로 보게 되었는데요. 뭐 별 거 있겠어, 라며 보기 시작한 지 한 시간만에 눈물과 콧물로 얼굴을 적셨습니다... TV 속 덕선이의 모습에 그 가족을 비롯한 온 동네 식구들이 기뻐하는 장면이었죠. 마치 제 안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던 어린 시절을 쑤욱 꺼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동네를 뛰던 모습, 감싸 안아주던 어머니, 허울 없던 아이들, 담의 경계가 희미하던 이웃들, 그렇게 오가던 발길들, 온 동네 가로등이 눈을 뜬 후에야 들어오시던 아버지. 여러 생각에, 그 따스함에, 그리움에, 혹은 지나버린 세월이 주는 슬픔에 그렇게 애처럼 울었나 봅니다.


응팔은 그 이후로도 인생의 주요 사건들, 때로는 생활 속의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시원한 웃음과 묵직한 감동을 전해주며 웰메이드 드라마로 남게 되었는데요. 응팔의 여러 스토리라인 중 재미 포인트의 하나는 덕선과 택이, 정팔 사이의 삼각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응팔의 버릴 게 없는 다양한 캐릭터 중에서 (이제는 정말 유명해졌지만) 당시 '못 생겼는데 잘 생긴 매력남'으로 주목받았던 김정환(류준열 분), 그가 덕선에게 보였던 까칠한 행동들을 '반동형성'이라는 방어기제를 통해 살펴볼까 합니다.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란?


반동형성은 '무의식적 욕구 충동을 억압만으로 극복할 수 없을 때 그것과 정반대의 욕구를 만들어냄으로써 대항하는 심리 현상'입니다. 역시나, 심리학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오늘도 어렵기만 하네요. 좀 더 쉽게 풀자면 '마음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한 예로 짝사랑하는 여자애를 심하게 놀리거나 괴롭히는 행동이 이에 해당됩니다.


'마음과 반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눠볼 수가 있어요. 긍정적인 마음이 부정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경우 그리고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긍정적 마음의 예를 들면, 앞서 언급했던 짝사랑 여자애에 대한 괴롭힘이 있는데요. 그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고무줄 끊는 행위'와 같이 부정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동생을 처음 접한 서너 살 아이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는 부모의 사랑을 앗아간 동생. 속에선 동생에 대한 질투와 원망이 있지만 아이는 오히려 그런 동생을 더 안아주고 예뻐합니다. 엄마 몰래 꼬집기도 하고요. ^^


반동형성이 아이들에게서만 나타날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인들의 일상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다만 성인들은 사회적인 학습으로 인해 그 모습이 정리돼 있어서 티가 잘 안 난다고 할까요. 그러면 성인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반동형성의 사례는 뭐가 있을까요. 읽어보면서 주변에 혹은 내 일상에도 동일한 경험이 없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긍정적 마음이 부정적 태도로 나타나는 예

- 좋아하는 대상을 오히려 괴롭히는 아이들
- 걱정이 되지만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
- 돕고 싶지만 냉담하게 대하는 사람(츤데레!)
- 부모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


부정적 마음이 긍정적 태도로 나타나는 예

- 동생에게 잘 대해주는 첫째 아이
- 사과를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 사실 내면의 강력한 소유욕을 감추기 위한 것.
- 미운 상대일수록 오히려 잘 대해주는 사람
-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 사람. 공격성이 너무 강해서 감추는 것.

좀 이해가 되시나요? 어쩌면 한두 개쯤은 내 이야기, 혹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응팔 속의 김정환은 어떤 반동형성을 보일까요.



김정팔의 반동형성


사실 정팔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덕선에 대한 호감을 반대되는 태도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거나 그녀를 언급할 일이 있으면 "야, 특공대.", "햄 먹지 말고 주스만 갖고 와라. 정봉이형 꺼다.", "얘가 공부가 잘 되겠냐, 18년 만에 처음 하는데.", "너 뭐하냐.", "아 근데 이게 진짜."와 같은 말들로 그녀를 공격합니다.



사실 정팔은 아래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덕선을 좋아해왔죠. 그럼에도 매번 반대되는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반동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혹은 안전한 자신의 공간에서만 활짝 드러나는 표정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죠. 아마 짝사랑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정팔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택이'는 정팔과는 상반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일상에서는 반동형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절제된 성격이지만 은근히 할 말 다하죠. 덕선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피곤할 때는 피곤하다, 좋을 때는 좋다고 얘기합니다. (여타 아들과 달리) 아버지에게도 사랑 표현을 서슴지 않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누군가가 물어 올 때는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반동형성으로 똘똘 말린 정팔이의 일상과는 많이 다르죠? 아마도 한국 남성 대부분은 택이 보다는 정팔에 가까울 것 같네요. ㅎ


그렇게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정팔, 그의 반동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올림픽에서 마다가스카르의 피켓걸로 선정된 덕선이 마당에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정팔이 마당으로 나오며 그녀를 보게 되는데요. 역시나 그답게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아! 귀신이냐?"


'한복 입은 사람 첨 보냐?'는 덕선의 낭랑한 대응에도 무심한 듯 지나치며 한 마디 더하죠.


"하, 진짜  가지가지한다. 가지가지 해."



개밥을 주고 돌아오는 길, "나 한복으로 바뀌었는데 어때? 이게 제일 낫지?" 라며 정해진 답변을 요구하는 덕선에게 정팔은 또 한 번 쐐기를 박습니다.


"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게 제일 나아."


"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마. 그게 제일 나아."
음매애애-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일 수도 있다고요?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엿보는 모습에서 그 가정을 반증합니다. 참 귀여운 장면이죠.

후다닥 (내 다리는 눈보다 빠르다.)





인간에게는 어떤 상황을 덜 위협적으로 이끌기 위해 그것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인간에게만 허락된 '능력'이 아닐까 싶은데요. 가장 대표적인 기제가 반동형성입니다. 정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반동형성은 아주 심하지만 않다면 누구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모습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관계의 위계와 깊이가 삶에서 상당히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반동형성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개인주의 문화권에 비해, 성장환경, 아버지와의 관계, 사회적인 자립, 관계의 구성원으로서 역할 등, 반동형성이 더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죠. 오죽하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만큼 우리는 맘속으로는 밉지만 이를 숨기고 오히려 친절을 베푸는 것, 다 드러내기보다는 숨기거나 그 반대로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반동형성이 신경증적 방어기제로 분리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억압의 정도가 심할 경우, 스스로에게 굉장한 피로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본인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심할 경우 그 태도에서 나타나는 거짓됨이나 어색함을 상대방도 느끼게 됩니다. 가령 (앞의 사례에서) 동생을 아끼는 서너 살 아이는 이따금 과한 애정표현을 하거나 너무 거칠게 안아주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본심과 다른 행동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죠.


내면을 억누르고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심리적 과정을 알아차리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적합한 타이밍에 중의적으로 잘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좀 더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 아닐까 합니다. 정팔이 역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덕선에게, 반동형성으로 첩첩 쌓인 평소 모습을 걷어내고 어렵게 진심을 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순간에 그의 부모님도, 덕선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우리들도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정팔의 반동형성으로부터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마음 열기 어려웠기에 지나쳐버린 우리의 지난 순간들을 그가 대신 열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 아버지를 위한 정환의 시도

가던 길 가야겠다.



* 어머니를 위한 정환의 시도

"엄마~ 아빠 또 연탄 날려먹었어~"




모든 만남은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글과의 인연을 계기로, 최근 일주일 동안 나에게 나타났던 반동형성을 떠올려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나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는 것이죠. 혹 오랜 시간 반복되어왔던 피로감의 원인을 찾게 된다면, 이번 기회에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변화라는 게 꼭 드라마틱하고 대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팔이가 우산 끝으로 연탄을 살짝 밀어낸 것처럼, 아주 작은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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