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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24. 2020

아무도 몰라줄 때

<빌리 엘리어트>

사랑하는 빌리.
이제 너에게 난 먼 기억 같은 거겠지.
네가 자라나는 모습과 울고 웃고 소리치는 모든 모습을 다 놓치고 말았구나.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다오.
내가 항상 함께 있다는 걸. 모든 순간 곁에 있다는 걸.
너를 알았다는 게 행복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 자랑스럽단다.
영원히 사랑한다.


18살이 되면 읽어보라던 엄마의 편지.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습니다. 11살 빌리는 이미 그 편지를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발레 선생님에게.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형의 레코드를 몰래 들으며 신들린 듯 춤추는 빌리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빌리는 춤을 좋아해요. 아버지의 강요로 권투를 배우고 있지만, 바로 옆엔 발레 교실이 운영 중이죠. 그렇게 근방을 기웃거리다가 이내 그 틈에 끼어 발 끝을 들어 올리게 됩니다. 땅뒤(tendu)!


빌리에게 있어 주변은 왜인지 늘 화가 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아버지도 형도 권투 코치도 심지어 발레 선생님도 말이죠. 발레 선생님은 툭하면 닥치라고 합니다. 피아노 반주자는 빌리가 얼간이 같다며 조롱합니다. 아버지와 형은 편의점에서 만난 이웃에게 시비를 거는가 하면, 발레 선생님과도 싸웁니다. 서로 싸울 때도 있습니다. 싸움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들 같아요.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난투극을 벌인 적이 있는데 아버지와 형도 빠질 리 없습니다. 어려웠던 시대, 그들 모두 감추기엔 너무 큰 분노와 슬픔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빌리는 뭔가 다릅니다. 그곳의 다른 어른들처럼 "네가 내 아픔을 알아?"라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죠.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주변은 내 얘길 들어주긴커녕 늘 강압적으로 소리치기만 합니다. 화가 날 때도, 두려울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빌리는 춤을 추기 시작해요.


발레 선생님에게 처음으로 칭찬 아닌 칭찬을 받고 귀가하는 길, 빌리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춤을 춥니다. 성큼성큼 뛰는가 하면 팔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크게 점프하면서 뛰어다니죠. 아버지에게 발레 레슨을 들키고 크게 혼난 날은 뒷산에 올라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합니다. 그런 모양새의 춤을 춥니다.


화가 난다 화가 나!!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억압된 충동이나 욕구를 사회적 가치를 지닌 형태로 표현하고 충족하는 것'을 승화(sublimation)라고 합니다. 빌리가 다른 어른들처럼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춤으로 연결하는 모습이 때론 더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하는데요. 성공적인 승화의 예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빌리의 승화를 보여주는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의미 있는 두 가지 장면을 빌리와 아버지(재키 엘리어트)의 시선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온 동네에 화를 냈다." - 빌리 엘리어트

로열 발레스쿨의 오디션을 놓친 날, 그날은 형이 들어간 구치소에서 온 가족이 밤을 새운 날이다. 발레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나는 아버지가 선생님도 때리시는 게 아닐지 무서웠다.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설득하려고 하셨고 아버지와 형은 그럴 리 없다며 소리쳤다. 결국 그들 모두 화가 난 얼굴로 뭔가를 뱉어냈다. 모든 게 짜증 났다. 무조건 안된다고 하는 아버지도, 그렇다고 불평할 수 없는 이 상황들도.


나는 뒷마당의 화장실로 가서 열불을 토했다. 발이 움직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왜인지 그걸 시작으로 온 마을을 휘저으며 화를 냈다. 손과 발끝의 동작 하나하나에 내가 느끼는 이 답답한 느낌을 실었다. 더 이상 발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못했다. 마을의 가장 구석에 도달한 후에야 주저앉았다.



"가장 막막한 순간, 빌리가 있었다." - 재키 엘리어트

다시는 빌리가 춤을 추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녀석의 권투 코치가 체육관에서 이상한 걸 봤다며 나를 부른다. 술기운 이겨내며 그곳을 향했다. 빌리는 그의 친구에게 발레복을 입히고는 속없이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파업 시위는 진전이 없었고, 더 버티긴 어려운 상황.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아내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셔 땔감으로 썼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찌할지 모르던 그때, 빌리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차 팔과 다리를 크게 휘두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것은 춤이었지만, 마치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미래를 말하는 것 같았다. 눈을 뗄 수 없다. 11살 내 아들, 빌리야. 내가 몰랐구나. 미안하다.


나는 빌리의 춤이 끝나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그의 발레선생님에게.



제 미래를 보세요



마치며 - 나의 승화는 어디에


이런 류의 영화들이 좋습니다. 어거스트 러시, 스쿨 오브 락, 4등, 파파로티, 제리 맥과이어, 시스터 엑트, 블랙스완, 말아톤, 즐거운 인생 등. 각 메시지는 다르지만, 역경을 극복하는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승화가 공통적으로 담겨있거든요. 한편으로는 뻔하지만, 그 뻔함을 삶에 녹이려면 참 많은 노력과 결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승화가 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빌리 역시 발레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선생님에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사실 전날 밤 아버지가 형에게 주먹을 날렸고, 형은 뭔가 큰 일을 벌일 듯한 표정으로 집을 나갔어요. 빌리는 악을 쓰며 말합니다.


"선생님은 실패했잖아요! 인생 말아먹은 걸 나에게 뒤집어 씌우지 말라고요!"


선생님은 빌리의 뺨을 때립니다. 그리곤 그를 안아줍니다. 둘은 다시 연습을 시작하죠.


이처럼 승화는 절대적인 비약이 아닌 삶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반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각종 예술 활동과 문화, 종교, 과학, 직업 성취 등으로 승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는데요. 툭하면 쌈박질을 하던 학생이 더 이상 무분별한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인정받는 격투기 선수가 되는 것이 승화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곤 합니다. 하지만 승화가 반드시 사회적 가치를 지니거나 활동적일 필요는 없어요.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장인의 표정으로 레고를 조립하는 것, 수집한 피규어들의 각을 잡고 멍하니 바라보는 것처럼, 나의 어려움을 해소하며 몰입할 수 있다면 모두 승화가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지금처럼 글을 쓰지요.




로열 발레스쿨의 오디션장. 발표를 끝내고 돌아가는 빌리에게 심사위원들이 묻습니다.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니?"


빌리는 곰곰이 생각한 후 대답합니다.


"모든 걸 잊어버려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나는 것 같아요."


아무도 나를 몰라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 바로 그때가 찾아야 할 순간일지도 몰라요. 모든 걸 잊게 해주는 그것.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그 어딘가를 누비게 해주는 나만의 승화를.


난다! 날어!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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