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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영국, 호박등이 빛나는 밤

축제 너머의 온기

by 봄이

오늘 장을 보러 슈퍼 몇 군데를 다녀왔다.
어딜 가든, 할로윈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슈퍼마다 크기별로 산더미처럼 쌓인 주황빛 호박들이 시선을 끌었다.
어떤 것은 벌써 껍질이 물러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고, 입구마다 해골과 으스스하게 조각된 호박들이 손님들을 맞이했다.

10월 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매장에는 할로윈 코스튬과 장식품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동네 이웃들도 창가를 일찍부터 괴이하게 꾸며 놓았다.
옆집의 호박등은 월초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계절을 앞질러 장식을 매단 사람들의 손길에는 묘한 조급함이 느껴졌다.
영국 사람들에게 할로윈은 그만큼 중요한 날인가 보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 한켠이 시끄럽게 흔들렸다.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이 시끌벅적한 축제가 묘하게 오래된 신앙과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본래 ‘할로윈(Halloween)’은 ‘All Hallows’ Eve’, 즉 모든 성인의 날 전야를 뜻했다.
죽은 이를 기리고,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경건한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거리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유령 복장과 사탕, 장식용 호박들 사이에서 신앙의 의미는 이미 희미해진 듯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도 묘한 쓸쓸함이 스며 있는 듯했다.
어쩌면 영국인들에게 할로윈은, 어린 시절의 향수와 공동체의 즐거움이 뒤섞인 하나의 문화 축제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시기가 싫지 않다.
마켓에 넘쳐나는 주황빛 호박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차가운 공기 속에 섞인 계피 향이 계절의 변화를 전해준다.
할로윈이 끝나갈 무렵, 나는 싸게 나온 호박을 골라 집으로 가져온다.

주방 불을 켜고 큼직하게 썬 호박을 냄비에 넣으면, 달큰한 향이 천천히 집 안을 채운다.
불 위에서 호박이 부드럽게 익어가는 동안, 나는 어릴 적 아랫목에서 엄마가 늙은 호박죽을 끓여 주시던 기억을 떠올린다.
동치미와 함께 먹던 따뜻한 기억, 호박죽 한 숟가락마다 배어 있던 계절의 온기.

거리의 호박등이 반짝이는 동안, 나는 그 빛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시끌벅적한 축제이지만, 내 시선은 주방 속 익어가는 호박과 그 속에 스며든 지난날의 온기에 머문다.


겨우내 끓어먹을 호박도 손질해 냉동고에 가득 구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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