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겨울은 늘 그렇듯 축축하고 흐리다. 몇 주째 이어진 눅눅한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제발 햇살 좀 보고 싶다...”
이번 여행의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따뜻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을 뿐. 짐을 싸는 동안에도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래, 실컷 내려라. 우리는 내일 떠난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새벽 버스를 타고 브리스톨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은 전적으로 딸이 세심하게 준비한 일정에 따라 움직이면 되는, 말 그대로 ‘효도 여행’이었다. 숙소, 도시 간 이동, 맛집 리스트까지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계획표만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자처하는 남편 모모는 여전히 계획된 여행을 낯설어했다.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여행이라니... 에구~그래, 한 번 믿어보자.”
투덜거림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으로 여행 첫날을 맞이했다.
⇲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일정
- 11/12 브리스톨 출발 → 말라가 도착
- 11/13 말라가
- 11/14 론다 이동(버스)
- 11/15 론다
- 11/16 세비야 이동(버스)
- 11/17~11/20 세비야
- 11/21 코르도바 & 메스키타
- 11/22 그라나다 이동(기차)
- 11/23~11/24 그라나다
- 11/25 말라가 공항 이동 (버스)
이번 여행기를 하루하루 일정 중심으로 풀어갈 예정이지만, 시작하기 전에 간단히 11월 안달루시아 여행 팁을 남겨본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는 11월에도 여행하기 좋은 지역이다. 한여름의 폭염이 사그라들고, 관광객이 줄어드는 이 시기에 낮 동안 따뜻한 햇살 속에서 한적하게 여행할 수 있다. 아침·저녁은 선선하지만 산책이나 도보 여행에는 오히려 최적이다. 비수기라 숙소·항공권 비용 부담이 적어 여행하기 한층 수월하다.
안달루시아는 독특한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나라다 알함브라 궁전, 코르도바의 메스키타, 세비야의 알카사르 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혼재된 건축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세비야와 그라나다의 플라멩코 공연은 남부 스페인의 정열적인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번 여행의 시작지 말라가(Málaga)는 안달루시아 문화의 또 다른 축이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고향이며, 시내 중심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피카소 미술관(Museo Picasso Málaga)이 자리해 있다. 여행 중 들르기만 해도 도시의 정체성과 예술적 기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안달루시아의 매력은 자연과 음식에서도 드러난다.
끝나지 않을 듯한 좁은 골목길, 골목길 안쪽 깊숙이 자리한 작은 광장, 광장 주변의 작고 오래된 술집들, 흰색 마을이 이어지는 언덕길, 시에라 네바다의 설산, 코스타 델 솔 해변까지 자연의 스펙트럼이 넓다. 또한 하몽 이베리코, 올리브유, 가스파초 같은 남부 스페인 특유의 음식들은 여행의 즐거움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유럽여행 중 나라 간 빠르고 유연하게 이동하는 팁!
easyJet, Ryanair, Wizz Air 같은 저비용항공사(LCC)가 영국 ↔ 유럽 각국 간 노선 운영. 가격이 저렴해 짧은 시간에 이동하거나 여러 나라를 많이 돌아다닐 계획이라면 항공이 유리. 다만, 이런 저가항공은 수하물 조건이 엄격하고, 좌석 선택·수하물·우선탑승 같은 옵션은 추가 요금이 붙는다. 우리도 각각 10kg 핸드캐리 추가했는데 그 비용이 둘 항공료보다 비쌌다. 배낭하나 메고 타기에 안성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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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브리스톨 공항에서 안달루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규모는 작지만 북적이는 브리스톨 공항에서 정신없이 체크인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두른 탓에 비행기에 오르자 피곤이 몰려왔고, 눈을 감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뜨니 창밖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구름 위로 뚫고 나온 순간, 회색 하늘은 사라지고 눈부신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그래, 하늘은 원래 이렇게 파랗지!”
모모와 나는 동시에 감탄했다. 긴장감과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며, 여행이 시작되는 감정이 밀려왔다.
말라가 공항에 도착하자, 영국의 습기와 회색빛은 이미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듯.
밖으로 나서니 건조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오면 바로 앞에 버스 승강장이 있고, 조금 더 걸어 나가면 전철역이 보인다. 우리는 1회용 티켓을 끊어 말라가 센트럴로 이동했다.
도시는 초저녁의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말라가는 로마 시대와 무어 시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시간이 뒤섞이는 느낌이 든다. 숙소로 향하던 중, 언덕 위 알카사바 요새가 어슴푸레 보였다.
골목을 잘못 들어 겨우 찾은 숙소에서 짐을 풀고, 현지인에게 추천받은 작은 골목 맛집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길, 오래된 바,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이어지는 풍경에 모모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을 따라 발걸음을 맞췄다.
골목 안쪽에 깊이 숨어있는 식당에서 와인 한 잔과 타파스를 주문했다.
바깥의 소음과 골목 풍경을 잊은 채, 우리는 천천히 첫날 저녁을 즐겼다.
해산물 타파스를 한 입 한 입 음미하니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 정말 오길 잘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음식 문화인 타파스(Tapas)는 작은 접시 요리를 뜻하지만, 그 기원은 더 소박하고 실용적인 곳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타파(tapa)'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덮개’를 의미하는데, 이는 옛 선술집에서 먼지나 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와인잔 위에 빵이나 햄을 덮어 두던 풍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작은 음식 조각이 잔의 ‘뚜껑’ 역할을 한 셈이다.
이 관습은 시간이 흐르며 독특한 음식 문화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바를 옮겨 다니며 여러 가지 타파스를 나누어 먹고 대화를 즐겼고, 이는 스페인의 사회적 분위기와 공동체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생활 방식이 되었다. 또한 각 지역의 재료와 정체성이 담긴 다양한 타파스는 작은 한 접시만으로도 스페인의 지리와 문화를 맛보게 한다.
오늘날 타파스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작은 한 조각의 음식이 만들어내는 넉넉한 여유와 소통의 가치가 바로 타파스의 매력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슈퍼에서 유난히 통통한 체리 한 봉지 샀다.
안달루시아 햇살을 가득 머금은 작은 선물 같았다.
숨은 골목, 작은 시장, 항구, 해변, 구시가지의 정취..., 지중해의 온기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맞이한 첫날의 풍경이었다.
이제, 안달루시아 12일의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