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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고향, 바람 속의 말라가

말라가, 하루의 풍경 속으로,,,

by 봄이

다음 날 아침, 말라가의 바람은 뜻밖에도 상쾌했다.
숙소 창밖으로 내려다본 거리는 고요했고, 은빛 안개가 도시를 살포시 덮고 있었다. 비를 피해 온 여행이었지만, 혹시라도 비를 또 만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시 스쳤다. 어젯밤 사 온 과일과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리는 천천히 말라가 여행을 시작했다. 문을 나서자, 아직 잠에서 덜 깬 도시의 공기가 포근하게 감쌌다. 긴 하루가 펼쳐질 것 같은 예감과 함께 말라가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낯선 골목길로 접어들자, 끝없이 이어질 듯한 좁은 길들이 얽혀 있었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도시 구조의 흔적이었고, 작은 광장들은 그 옛날 상인과 주민들이 오가던 삶의 터전이자 쉼터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자, 흐린 하늘 아래 말라가 대성당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탑만 완성되어 ‘한쪽 팔 없는 성당’으로 불리는 이 성당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지어진 곳으로, 경제적 이유로 두 번째 탑이 완성되지 못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높게 뻗은 돔과 아치로 형성된 중앙 천정이었다. 황금빛 자연광이 천장을 따라 은은하게 흘러 들어오며, 길게 이어진 아치와 기둥 사이 공간을 부드럽게 밝히고 있었다.

중앙 통로 끝에는 장엄한 주요 제단이 자리하고, 그 앞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합창대가 길게 놓여 있었다. 합창대 뒤로 솟은 파이프 오르간은 제단을 향해 일렬로 배열되어, 공간 전체에 깊은 울림과 장엄함을 더했다. 제단 근처 십자가상은 고통보다는 평온을 강조하며, 오랜 기도와 숨결을 고요히 받아내는 듯했다.

잔잔한 빛이 높은 창을 뚫고 흘러들어 돌기둥을 감싸는 동안, 성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작은 방처럼 자리한 채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 성모 마리아 채플: 르네상스 양식의 장식과 조각이 돋보이며, 장미의 여왕 성모마리아를 기리는 신자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공간.

‣ 성 요셉 채플: 단아하지만 의미 깊은 공간,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루며 성 요셉의 생애를 묘사.

‣ 성 십자가 채플: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신성함과 경외감을 주는 공간.

‣ 성 안토니오 채플: 작은 규모지만 세밀한 조각과 벽화가 인상적인 명상 공간.

‣ 주보성인 채플: 중앙 제단 위 예수상과 화려한 바로크 제단으로 신자들의 경배와 명상 중심 공간.

‣ 기타 채플에 대한 설명은 이하 생략



성당을 나서자, 골목 한편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를 어깨에 올린 한 남자가 피리를 불며 천천히 골목을 지나갔다. 부드러운 음률은 흐린 하늘 아래 더욱 잔잔하게 퍼졌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잠시 시선을 멈추고 작은 성의를 건넸다. 그는 짧게 다시 한번 피리를 불고, 고양이를 어깨에 걸친 채 조용히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성당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닿는 말라가 피카소 박물관.
박물관은 장기 컬렉션과 계절마다 바뀌는 단기 전시로 피카소의 세계를 여러 방향에서 펼쳐 보인다.

장기 컬렉션은 초기작부터 실험적 시기, 회화와 조각을 아우르는 피카소가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세워 올린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그의 예술이 결국 말라가라는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은근히 일러준다.

단기 전시는 연구 중심 전시부터 현대 작가들의 재해석까지, 피카소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을 더한다. 2025년의 Picasso: The Royan Sketchbooks와 Picasso: Memory and Desire 역시 그의 창작 과정과 오늘의 예술을 잇는 흐름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이곳에서 만난 ‘피카소’는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두 번의 방문 동안 나는 조금씩 다른 얼굴의 피카소를 마주했고, 그 변화는 곧 그의 예술이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말라가는 그 생동감의 첫 출발점임을, 박물관을 거닐며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 피가소의 첫 번째 부인 'Olga Khokhlova in Mantilla 1919'와 장기 전시작품 일부


피카소의 여운을 뒤로하고 박물관을 나와 알카사바로 향하는 골목으로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들었다. 거리는 오래된 목재 간판과 현대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창가의 화분들은 흐린 날씨 속에서도 싱그럽기만 했다.


알카사바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돌계단 사이로 드러나는 성벽이 조용히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오래전 로마 제국의 속주 히스파니아였다. 로마의 길과 광장, 라틴어의 흔적은 지금도 스페인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뒤를 이은 비시고트 왕국은 톨레도를 중심으로 스페인을 다스렸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이슬람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병력은 비시고트 왕 로데리코를 과달레테 전투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남부는 빠르게 '알 안달루스' 시대에 접어들었다.

종교가 달라도 세금을 내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기독교인·유대인·무슬림이 함께 살았다. 그 시기 코르도바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 중 하나로 떠올랐다.

우리가 오르는 언덕의 알카사바는 바로 그 시대에 지어진 중요한 방어 요새였다.


알카사바입구,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티켓오피스가 나온다. 자동발권기에서 직접구매 또는 온라인 구매 가능.

https://www.malagatop.com/en/what-to-see-in-malaga/alcazaba-of-malaga/?utm_source=chatgpt.com


언덕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흐린 하늘이 항구 위로 낮게 내려앉아 안개 커튼을 살포시 드리우고 있었다. 숨이 가빠오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잠시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잊게 했다. 고요히 줄지어 선 유람선과 요트, 잿빛 바다 위로 흘러가는 구름, 모든 것이 오후의 정적 속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흔들렸다.

그때, 햇살 대신 부드러운 빛을 등지고 스페인 할머니가 미소 지으며 올리브 몇 알을 내밀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 따스한 마음은 그대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리브를 손에 쥔 채 길을 따라 걸아 가면, 이슬람식 정원과 작은 안뜰을 지나 산책로인 코레아(Coracha)에 접어든다. 한때 군인들이 오가던 전략적 길이지만, 지금은 여행객들이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책로가 되었다.

길은 완만한 오르내림과 함께 야자수와 꽃나무 사이를 지나고, 멀리 지중해가 흐린 하늘 아래 점점 넓게 펼쳐진다.

말라가를 내려다보는 언덕 정상에 자리한 히브랄파로 성은, 도시의 역사가 가장 무겁게 내려앉은 장소다. 성문을 지나면 바람이 먼저 맞아주고, 그 뒤로 천 년의 돌기둥과 성벽이 조용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파른 경사에 따라 겹겹이 쌓인 성곽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방패처럼 보이는데, 이는 이곳이 처음부터 오직 방어를 위해 지어진 요새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성의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우물이 깊게 파여 있다. 40미터 아래까지 이어진 우물은, 포위 전 속에서도 물을 끊지 않으려는 옛 병사들의 절박함이 보인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굽이친 돌길 사이로 말라가의 항구가 푸르게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라면 적의 돛대 하나가 수평선에 떠오르는 순간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87년, 이 성은 말라가가 기독교 군주에게 함락되기 직전까지 마지막 숨을 버티던 요새였다. 수개월 동안 연기를 내뿜으며 버티던 자리에서 지금은 고요한 바람만이 흐른다. 그러나 성벽에 손을 얹고 잠시 눈을 감으면, 돌 너머 어딘가에 여전히 무사들의 발소리가 묻혀 있는 듯하다.


⇲ 성에서 내려오던 길에 들은 골목길, 너무나 예쁜 술집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에 강행군으로 곧 쓰러질 것 같던 이가 살아났다. (근접 촬영 노출 금지....^^)

성벽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던 중, 잠깐 들른 펍에서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인 뒤, 걸음을 옮기자 돌길 너머로 울창한 푸른 나무 숲이 펼쳐졌다. 오래된 요새의 거친 돌과 바람의 잔향은 서서히 잦아들고, 경사가 완만해질 즈음 길은 자연스럽게 파세오 델 파르케(긴 산책공원)로 이어진다.

공원은 해안가 가까이에 자리 잡아, 성곽에서 내려온 길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요한 녹지다. 길 양옆으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야자수가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잎이 넓은 나무들과 작은 꽃들이 어우러져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주황빛 스트렐리치아(Bird of Paradise)였다. 산책길 곳곳에 활짝 피어난 그 꽃은 화려한 주황과 짙은 파란색이 섞여, 마치 작은 새가 정원 사이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 꽃을 말라가 대성당 정원에서도 봤었고, 알카사바에서도 많이도 피어있었다.

잠시 벤치에 앉자, 성벽 위에서 느꼈던 바람과는 또 다른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뭇잎 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고, 지중해 특유의 짭조름한 바다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라 말라게타 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변이 가까워지자 공원 나무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잿빛 지중해가 넓게 펼쳐졌다. 흐린 오후의 바다는 잔잔히 흔들렸고, 모래 위에는 발자국과 물방울이 얇게 섞여 있었다.

오전부터 걱정했던 것처럼, 바다와 하늘 사이로 잔잔한 빗줄기가 내려와 모래를 적셨다. 야자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바다 냄새와 빗물 향이 어우러져 한가롭고 차분한 해변 풍경이 이어졌다.

신발을 벗고 모래 위를 걸으며, 오늘 하루의 풍경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말라가 대성당의 황금빛 아치와 웅장한 합창대, 채플마다 스며든 고요한 기도와 빛.
골목길에서 마주한 피리 부는 남자와 고양이, 그리고 피카소 박물관에서 마주한 다양한 작품들의 생동감.
알카사바 돌계단을 오르며 느낀 바람과 항구 위 안개의 고요,
히브랄파로 성벽에서 내려다본 푸른 바다와 천 년의 돌기둥,
공원 속 주황빛 스트렐리치아와 바다 향기까지.

모래 위 발자국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조용히 겹쳐졌다.

여행은 목적지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에 풍경과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발길을 돌려 해변을 떠나자, 구시가지는 저녁이 가까워지며 따뜻한 불빛으로 깨어났다. 좁은 돌길 사이로 스며드는 빗내음과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낮 동안의 고요와는 또 다른 활기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작은 바에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 아래 타파스가 차례로 놓였고, 이어 커다란 팬에 담긴 파에야가 향을 퍼뜨렸다. 바삭한 크로켓과 구운 문어, 올리브가 섞인 저녁은 하루 종일 걷고 바라본 풍경 속 긴장을 풀어주며, 잠시 전까지 잿빛이던 말라가가 다시금 금빛으로 반짝이는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니,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여전히 흩날렸지만, 그것마저 도시의 정취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며 우리는 내일 론다로 떠날 계획을 떠올렸다.

산과 협곡 위에 자리한 도시의 풍경을 기대하는 마음과, 혹시 내일 비가 내릴까 하는 걱정이 뒤섞였다. 그러나 오늘 하루처럼 흐린 하늘과 부드러운 빗속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웠듯, 모로코 연안과 가까운 지중해 해변의 온화한 공기 속에서, 내일의 론다 역시 어떤 모습이든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간을 건네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가벼운 우려와 은근한 기대를 품은 채, 말라가의 골목 속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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