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11월 22일 월요일
바람이 한결 쌀쌀해졌다. 겨울이 오고 있다.
카페 문을 활짝 열고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는 설. 그리고 들어온 첫 손님은 외국인이었다. 긴 코트를 입은, 인도나 파키스탄 언저리쯤에서 온 듯한 신사였다. 따뜻한 바닐라 라테를 주문하고 테이크 아웃을 부탁했다. 우유를 데우기 위해 비커에 따르다가 흘리고 바닐라 가루를 커피에 덜다가 정해진 중량을 넘어버리는 둥 어리바리한 커피 재조를 하고 있는데, 카운터에 바짝 다가서 있던 그가 카페 안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완성된 음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더니, 번역 어플로 “당신의 사업이 아름답습니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었다. 그가 카페에서 가장 반한 곳은 바로 바닥! 짙은 회색으로 에폭시를 한 카페 바닥이 멋있다며 엄지를 들어주었다. 그는 카페 앞 도로변에 놓아둔 주황색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더니 누군가를 만나 차를 타고 가버렸다.
11월 23일 화요일
사과도 없이, 추징금도 내지 않은 학살자 전 씨가 가버렸다. 사망 시각 오전 8시 45분. 내가 출근하는 길 무지개를 본 시간 오전 9시.
11월 24일 수요일
또 다른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오늘 읍내에 오픈한다. 날은 흐리고 ‘위드 코로나’를 선언한 이후 확진자가 계속 늘어만 간다. 약간 무뎌진 감각.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역을 무시하고 있는데 왜 우리만 잘 지켜야 하는 것인가 하는 반항심이 든다.
큰 테이블 위에는 전등이 5개가 있다. 그중 하나가 접촉 불량으로 자꾸 불이 꺼진다. 전구 자체가 고장 난 것은 아니었는지, 소켓을 잡고 잘 맞춰서 돌리니 다시 불이 들어왔다.
이번 주 금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막내 초등학교 캠프가 갑자기 취소되었다. 학교에서 하는 1박 캠프였으며, 학부모들이 오징어 게임을 준비하고 여러 가지 상품을 구입해두었는데. 게다가 나 또한 같이 놀아 보겠다고 토요일 근무를 일요일로 바꾸어놓은 상태인데 말이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허탈해하고 있다.
11월 25일 목요일
설이 점심을 먹으러 간 동안 레몬 생강차 주문이 들어왔다.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레시피를 보며 재료를 하나하나 넣었는데, 레시피에 적힌 것 중, 파인애플 레몬청과 레몬청이 따로 적혀있었다. 레시피를 확정한 사람은 종업원 최이기 때문에 파인애플 레몬청과 그냥 레몬청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정말 느끼고 있다면 절대미각의 소유자겠지만. 음료 제조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 건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므로, 그다지 기쁘지 않다. 다음에 다시 한번 레몬 생강차 주문을 받게 되면 난 한 가지만 선택해서 중량을 맞추게 될 것 같다. 귀찮은 건 딱 질색.
오전 바느질 모임에서 화두는 단연 학교 1박 캠프 취소 사건(!)이었다. 학교는 방역 수칙이 가장 잘 지켜지는 곳이다. 공무원인 선생님들은 한 명이라도 코로나에 감염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조심’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 뭐 하나 잘못될까 봐 벌벌 떠는 바람에 조금의 추진력도 몽땅 사라져 버렸다. 캠프가 열린다고 월차를 내거나 반차를 낸 학부모들, 기대에 찬 아이들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일정대로 캠프는 열려야 한다는 강력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 학부모들의 의견을 받은 학부모회와 학교가 다시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결국 오후 무렵 일정대로 캠프는 하되, 1 박하지 않고 오후 10시에 마치는 것으로 결론을 내었다. 1박이 없어진 건 아쉽지만, 그래도 하게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학교에서 다시 캠프를 하게 되었다며 보낸 단체문자에는 ‘학부모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라는 문구가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학부모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므로, 이후 어떤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그 책임은 ‘학부모’들에게 있다는, 그런 강력한 뉘앙스가 풍겼다. 씁쓸한 기분이다.
11월 26일 금요일
학교에 등장한 프런트맨. 오징어 게임 가면을 쓴 행사요원들과 다양한 게임을 즐긴 아이들. 2년 동안 묶인 아이들과 사람들의 욕구가 제대로 폭발하였다. 노래 한 소절 듣고 제목 맞추기, 막대기로 제기차기 등 다양한 게임을 즐겁게 즐긴 후, 마지막 행운권 추첨을 했는데, 오늘의 가장 비싼 상품이었던 선풍기를 막내딸이 받았다! 추첨에 당첨되다니. 그런 행운은 정말 처음이었다.
11월 27일 토요일
근무는 하지 않지만 둘째 학원 때문에 다시 읍내로 출동했다. 2시간 동안 시간을 보낼 곳을 찾다가, 오픈했다는 소문만 듣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파스쿠찌 카페로 갔다. 일기나 쓰면서 기다릴까 하고 2층에 올라갔더니, 어제 캠프를 같이 즐긴 학부모 몇몇이 오전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일기 쓰기는 물 건너가고 오전 시간을 아주 알차게 수다를 즐겼다.
11월 28일 일요일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겨울 아침이다. 단골장이 와서 차를 마신 후, 집에 있는 닭장을 손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떠났다. 길 건너 광고 사장 맹과 일행이 와서 오전 잡담을 나누었다.
이틀 전, 구입한 후 냉장고에 며칠 보관해 두었던 딸기로 케이크를 만들었었는데, 오늘 상태를 보니 윗면에 장식한 딸기가 맛이 가고 있었다. 상태 안 좋은 케이크를 2조각이나 먹어치웠다.
커피와 맥주를 같이 먹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 때문에 식과 일행은 커피 2잔과 케이크, 맥주를 시켰다. 맥주에 함께 나가는 안주를 조금 담아주고 음료를 손님에게 가져다준 후 정리하다가, 안주가 들어있는 통을 바닥에 와장창 쏟아버리고 말았다. 꽤 많이 담겨있던 땅콩들과 미니 프레첼이 바닥에 가득 떨어져 버렸다. 한동안 잘 지내나 싶었는데, 또 일을 저지르다니. 허탈한 마음으로 창고에서 쓰레받기를 꺼내다가 맥주 박스에 끼어 쓰레받기 손잡이만 쏙 빠져버렸다. 낑낑 대며 맥주 박스를 치우고 쓰레받기를 꺼내 빠진 손잡이를 다시 끼우고 바닥을 쓸었다. 카운터 쪽 바닥이었으니 망정이지, 홀 내부에서 쏟았음 더 당황했을 뻔. 다시 안주를 새로 통에 채우고 냉장고에 넣었다.
카페라테를 주문하는 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마스크로 입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귀가 안 좋은 나 같은 사람은 목소리가 작은 사람의 말소리를 잘 알알들을 수가 없다. 회원임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번호 뒷자리를 알아야 하는데, 너무 작게 말해서 온 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고 들어야 했다. 오늘처럼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손님들이 특히나 목소리가 남다를 때는 더욱 알아듣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