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틴더
<패터슨>, <버드맨>, <셰이브오브워터:사랑의 모양>, <이터널 선샤인>의 포스터, 그리고 얼굴이 가려진 전신 사진 두 장. 당시 나의 틴더 프로필 사진이었다. 아이디는 “무비즘”. 영화 외엔 딱히 취미가 없던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프로필로 해두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동시에 다른 틴더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했다. 틴더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근육을 지닌 사람들은 웃통을 벗어 던져 성난 근육을 어필했고, 잘생긴 사람들은(부럽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고, 패셔너블한 사람들은 본인의 ootd를 프로필로 설정해 이성에게 열렬히 구애했다. 나는 근육질도 아니고, 핸섬남이나 패션피플도 아니었기에 최대한 있어 보이는(?) 영화들을 프로필로 설정해 두어 취향을 무기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를 썼다.
희희(당시 그녀의 틴더 아이디) 님은 나의 영화 취향이 남달라서 나를 오른쪽으로 스와이프(틴더에서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오른쪽으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왼쪽으로 스와이프한다) 해주었다고 말했다. ‘먹혀들었구나’ 싶은 생각과 함께 그녀의 프로필 사진들을 다시금 보았다. 역시나 예뻤다.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간절함은 때론 독이 된다. 이건 밀당과 다르다. 겸손함과 자신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한다.
“영화나 음악 취향이 제일 중요하지는 않지만 취향의 결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리고 저도 코스 옷 좋아하구요”
오예! 회사 팀장님과 같이 점심을 먹고 쇼핑을 하러 코스 매장에 가서 큰맘 먹고 비싼 니트를 하나 샀었다. 그때 탈의실에서 찍었던 사진을 프로필로 해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됐다니. 난생처음 산 코스 니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취향이 내적인 매력이라면 패션은 외적인 매력이다. 패션 칭찬을 받았으니 나도 외적인 매력에 대한 호의적인 칭찬이 필요하다.
“희희 님은 패완얼의 정석일 것 같은데요?”
“아쉽게도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얼굴이 봐줄 만해서 ㅎㅎㅎ”
역시 예쁜 사람은 자기가 예쁜 걸 아는구나. 귀여웠다. 봐줄만 하다니. 훗.
“하하 얼굴 예쁜건 잘 아시는군요?”
“모른다고 하면 너무 내숭 같아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어요”
“맞아요 예뻐요 진짜 희희님”
“ㅋㅋㅋㅋㅋㅋㅋㅋ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녀와의 대화가 몽긍몽글 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나이는 딱 좋은 여섯 살 차이(사실 이때는 뭘 해도 딱 좋을수 밖에 없는 몽글함이 우리를 지배했다), 전공은 언론정보로 같았다. 그녀의 직업은 카피라이터. 나도 모바일 광고업계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광고 대행사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본인의 회사 위치를 알려주자마자 그녀의 회사를 맞힐 수 있었다. 게다가 웬걸 그 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지인이 있었다.
“저희 독서 모임에 카피라이터분도 희희 님과 같은 회사예요..”
“설마 00카피 님이신가, 아니면 00 대리님?
“두 분 다 아니에요 :) 저보다 한 살 많은 분이에요”
“알겠다! L차장님!”
“크 신기하다 맞아요. 그분이에요”
“세상에.. L 차장님 제 첫 사수예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어느 정도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온라인에서 함께 아는 지인을 대화 초반에 알게 되다니. 틴더를 설치한지 20분 만에(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와 매칭이 된 그녀는 분명 소개팅 앱으로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텐데 이로써 나는 ‘인증된’ 사람이 되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고 승부수를 띄웠다.
“희희님 카톡이나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좋아요. 이거예요!”
카톡으로 넘어오자 소개팅 앱이 주는 이름 모를 불안감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만날 일만 남았다. 통성명을 하고, 서로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몽글해진 분위기를 거름 삼아 설렘이라는 꽃이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카톡의 1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카톡 창을 열어둔 채 대화를 나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빨리 만나요” 라고 말했다. “빨리 만나요”는 순식간에 레벨업을 하여 “빨리 보고 싶어요”로 업그레이드되었고 날을 잡기 시작했다. 다가올 주말에는 각자 선약이 있어 만날 수 없었다. 그 다음 주로 약속을 미루는 것은 애초에 옵션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다음 주가 없었다. 이 마음 상태로는 당장 내일이라도 봐야 했다. 평일이었던 내일 티타임이라도 하자고 난 제안했고, 그녀는 좋다고 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본적도 없는 그녀와 난 이미 결혼하는 상상까지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안해졌다. ‘실제로 나를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하지만 설렘은 불안감을 단번에 제압했다. 나아가 설렘은 우리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나는 그간 모아두었던 경박티콘을 동원해 나의 신남을 마구 표현했고, 그녀는 나의 경박티콘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아 맞다, 경박티콘 좋아하고 쓰는 남자 어..때요?”
“좋아해요!!! 지금부터!”
“뭐야 정말, 원래 이렇게 예쁘고 말하고 그래요?”
“아니요. 저는 원래 빙수랍니다..”
“나한테 근데 왜 그래요. 정말 꽃 같네”
신기했다. 그녀와 나는 분명 결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개떡같은 드립을 던져도 찰떡같이 받아들이고 반응했다. 우리는 별게 다 똑같다며 신기해했다. 세 시간 동안 쉼 없이 대화를 이어 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그녀는 이제 진짜 자야겠다고 말한 뒤 내일 만남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카톡을 보냈다. ‘기도’라니. 나는 그녀에게 종교가 있냐고 물었다. 그녀가 답했다.
“오빠는?? 난 교회 다녀”
“나는 교회는 안나가지만 기독교인이야.. 소름.. 우리 아부지 목사야”
“뭐???”
“...” (괜히 말했나 싶었다)
“우리 아빠 목사님이야”
“뭐? 내 말 따라 한 거야? 응? 뭐?”
“오빠 말이 돼?? 아니, 이게 말이 돼?? 소개팅을 받아도 이렇게 맞을 순 없을 텐데..”
누워서 카톡하고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게 진짜 말이 되는 일인가? 틴더로 만난 여자와 이리도 잘 맞을 수 있는 것인가? 싶었다. 영화 취향, 유머 코드, 그리고 함께 아는 지인도 있고 전공도 같았다. 일하고 있는 업계도 같아 신기해하던 찰나에 이런 일이. 오 할렐루야. 정신을 다잡고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술은 마시냐고. 난 술을 즐기는 나일론 크리스천이었고, 와이프와 퇴근 후 와인한잔 하는 것이 로망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역시나 Yes. 미쳤다. 말 그대로 별.다.똑(별게 다 똑같아)이었다. ‘그녀는 이제 내 와이프가 될 사람이다. 이건 신의 뜻이다. 거스를 수 없다. 난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지.’ 너무 앞서간 생각이었지만 이는 분명 현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함께 실컷 놀라고, 각자의 방에서 날뛰며(적어도 그랬다 정말), 우린 더 가까워진 채로 굿나잇 인사를 나눴다. 카톡이 끝나고 모든 것이 멍해졌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신기루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잠을 자야 했다. 붓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았다. 잘 잤냐는 그녀의 카톡이 와있었다. 휴, 신기루가 아니었구나. 이제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출근을 하고 겨우 일들을 쳐냈다. 약속 시각이 점점 다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