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예!!!!!!!!!!!!!(feat. 휘성)
약속장소인 투썸플레이스에 10분 일찍 도착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멈추고 싶었지만 이미 다리는 뇌에서 내리는 명령을 듣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약속 시각이 다가올수록 다리는 더욱 더 힘을내어 빠르게 뛰었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날 때마다 제발 그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까지 신나게 풀었으니 그냥 저 멀리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어제 나누었던 애정의 카톡들이 떠오르자 부끄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만지고, 이 옷 저 옷 입어보며 나름 베스트 착장으로 나왔지만, 서울에서 제일 멋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선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싶은 순간 그녀가 투썸에 도착했다.
단아하고 고혹적인 옷차림의 그녀는 예뻤다. 마스크가 그녀의 얼굴을 다 가렸지만, 그녀의 미모만큼은 가릴 수 없었다. 커피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마스크를 벗었다. 첫인상을 결정짓는데 누가 3초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내겐 단지 0.3초면 됐다. 하얗고 맑은 피부와 선명하고 빛나는 눈빛, 많이 웃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색하지 않은 - 그렇다고 프로페셔널한 웃음도 아닌- 환한 미소까지. 첫인상이야말로 커플이라는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1차 서류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고스펙자였다. 단연코 수석 합격이다. 그녀와 함께 버진로드를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주 맛있고 시원한 김칫국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박장대소가 아닌 설렘 가득한 미소로 웃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녀도 내가 싫진 않아 보였다. 그녀의 웃음은 애매모호함, 불안감이 섞여 있는 예의차린 웃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대로 된 연애, 정착하여 결혼까지 갈 수 있는 연애를 할 수 있어! 내 꿈을 이루는 거야!’ 간만에 마주한 희망찬 마음 앞에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짧은 만남 동안 우리는 충분한 설렘을 나누고 헤어졌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구애를 하기 위해 열량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안고 회사로 복귀했다.
1차 서류를 통과했다고 확신한 뒤 2차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가치관, 가족, 목표, 음식과 음악 영화를 망라한 취향, 이상형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눴다. ‘키스 할 수 있는 절친’이 이상형이야 라는 나의 말에 그녀는 이상형을 어떻게 그렇게 단 여덟 글자로 표현할 수 있냐며 나를 칭찬했다. 분위기가 좋았다. 두 번의 만남을 더 가졌고 우리는 쉴 새 없이 삶을 나누며 깊어지고 있었다. 아니, 깊어지고 있다고 착각을 했었다.
문득 이상했다. 다툰 것도 아니고, 내가 실수한 것도 없었는데 그녀는 처음과 달라졌다. (비록 고작 세 번 만난것이고, 밥은 한번 밖에 먹지 않았지만) 그녀와 틴더에서 그리고 카톡으로 넘어와 나눈 대화들을 다시 보았다. 당시 그녀는 꽤 적극적이었다. 빨리 보자고도 해주었고, 나를 두고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 같다고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본인 일상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분명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녀와 나의 거리는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설렘에 눈이 멀어, 그녀의 최종면접에 합격하여 커플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싶은 간절함에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달리기만 하였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착각이라는 러닝머신 위에서 혼자 달리고 있었다. 다시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괜히 예민한 것이라고 애써 불안감을 감춰보려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밤 9시, 그녀에게 드라이브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피곤하다며 다음에 가자고 했다. ‘불안’이라는 녀석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거봐, 그녀가 변했잖아’
다음날 굿모닝 인사를 나눈 뒤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
“희희가 맨 처음에 보여줬던 적극적인 모습이 한 번 만나고 나서는 조금 사라진 것을 느꼈어. 살짝 찌질하지만 계속 담아두면 찌질 찌질함이 될까 봐 그냥 말해 ><”
“그렇구나.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듣고 나서 보니까 그런 거 같아. 맞는거 같아. 흠, 왜 그러지 내가!”
“재밌고 좋지만, 그렇게까지 남자로는 못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어!?”
“헉 굉장히 빠른 판단이다..”
“나의 빅데이터에 의한다면 말이지 풉”
“오빠 혹시 지금 내가 어떤 판단을 해주길 바래??”
“노우노우, ‘내 생각은 이렇다’를 일단 전달하는 것이 목표우야. 너도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말해줘서 고마웜 ㅠㅠ”
애써 밝게 드립을 치며 카톡을 하긴 했지만 내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라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그날 우리는 다시 일상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속 빈 강정 토크였다. 세상 자연스럽게 그날 이후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게 됐다. 또다시 실패구나.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예!” 노래의 구절이 내 마음을 후벼팠다. 이상하다. 이번엔 성공이라고 확신을 했는데. 우린 별게 다 똑같은 별다똑 커플이었는데. 왜 또 나는 실패를 맛봐야 할까? 부정적인 마음들은 내 정신과 육체를 지배했다. 야식을 주문했고, 술 약속을 잡았다. 내친김에 친구의 소개팅 제안에 Yes라고 답했다. 실패의 공포로 벌벌 떠는 마음을 대변하듯 다시 다리가 마구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