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34살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털보입니다.”
“하하하, 그렇죠? 취미는 뭐예요?”
“아, 저도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그럼 퇴근 후에는 보통 뭐 하세요?”
“운동 좋아하시는구나.”
“MBTI요? 글쎄요, 저 크게 관심은 없는데 정의로운 사회 운동가래요.”
“오 MBTI 전문가시네요. 대단하시다. 술잔이 비었네요. 제가 소맥 말아 드릴게요.”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던 소개팅. 지난하고 고된 자리였다. 비단 나만 그랬을까. 시간 내어 나와준 상대방도 아마도 같은 생각이었을 터. 하지만 소개팅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주선자의 얼굴도 아른거리고, 다음날 주선자와 소개팅녀가 나눌 대화까지 생각하면 예를 갖춰야 한다. 그래, 나는 영업사원이다. 적어도 똥이 아닌 된장이라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 자신 있는 분야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영업사원으로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 앞으로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몇 번이나 더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할까? 1차, 2차, 3차를 통과해 커플이 되어 결혼으로의 승진까지 한 친구들이 새삼스럽게 대단했다. 유부남 친구들에게 ‘너네 인생은 이제 끝이야’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것을 반성했다. 아, 딴생각하면 안된다. 예를 갖춰야지.
“여기 음식 괜찮죠? 짠! 할까요?”
비록 마음 한편에 이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의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음식은 맛있었고, 술은 달았다. 벌컥벌컥 소맥을 들이키고 나니 헛헛했다. ‘역시 내 외모가 별로였던 거지. 그런 거지. 그거 아니면 뭐겠어. 술이나 더 마시고 아주 뚱뚱보 털보가 되어서 평생 혼자 살아야지. 꿈은 무슨 꿈이냐 정신 차려라 털보야.’ 희희 님은 도둑놈이었다. 내 마음을 훔쳐 간 도둑이 아닌 내 자존감을 훔쳐 간 도둑.
술김에 희희가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낯선 이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며 소개팅녀와 술을 연거푸 마셔댔다. 10일간 희희 생각이 안 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그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연애도 하지 않았으면서 결혼까지 생각했던, 별 이유 없이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 나의 모습을 나 스스로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공개할 수 없는 치부가 되어버린 희희와의 이야기는 가슴속에 묻어둬야 했다. 희희를 생각할 때마다 자존감은 깎여 나갔고, 그 후유증은 자기비하로 표출됐다. 다이어트를 해서 멋있어지고, 남친댄디룩 ootd 를 위해 쇼핑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는 역시 안돼’라는 화려한(?) 생각이 나를 감쌌다.
소개팅녀와 2차를 갔다.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술을 그만하기엔 아쉬움이 컸다. 술과 그녀는 그 순간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나의 외로운 밤에 말을 걸어주고 취기를 올려주는 그런 친구. 우리는 술에 대한 예를 갖추며 시간을 보냈다. 신나게 노가리를 뜯고 있던 와중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희희였다. 술김인진 몰라도 나와 핸드폰 빼고 모든 세계가 슬로우 모션으로 바뀌었다. 아이폰의 진동이 이토록 셌던가. 약 1분간의 긴 시간이 흘러 희희의 전화는 부재중 전화로 변했다. 1분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참나, 어이없어.’, ‘뭐지, 잘못 눌렀나? 에이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거야’, ‘혹시 내가 보고 싶어서?’, ‘아니지, 난 못생긴 털보인데’ 등 그녀가 전화한 의도를 두고 내 안에서 천사와 악마가 맞짱을 떴다. 때마침 소개팅녀는 막잔을 하고 가자고 제안했고, 나는 잃어버린 취기를 다시 찾아 “오케이!” 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개팅녀와 나는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취기 때문일까, 희희 때문일까. 핸드폰을 들고 희희 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늦어 희희가 자고 있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고 있다면 깨우고 싶었다.
“여보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