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해줘서 고마워
이걸 읽고 마법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랑 그 자체가 마법이며 글 또한 그렇다. 호밀밭의 파수꾼 글귀처럼 픽션이 기적을 가능토록 했다.
인간은 잉크, 종이와 상상력의 산물이다.
난 샐린저가 아니지만, 그 기적을 목격했다.
작가는 입이 아닌 엉혼으로 글을 써낸다.
그녀는 하나의 존재로 내게 다가왔고 그런 그녀를 붙잡은 난 행운아였다.
영화 루비스팍스 中
‘난 행운아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꿈을 이룬다면 난 행운아겠지? 어쩌면 다시 찾아온 기회일 수도 있다. 잘하자.’란 생각이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뭐야?”
제기랄. 마음 따로 입 따로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전화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은 명예를 지키고자 했고, 자존심의 명령을 받은 입은 최대한 퉁명스럽게 희희를 공격했다.
“오빠 잘 지냈어?”
“응, 잘 지냈는데 누구 때문에 못 지냈어.”
퉁명스럽게 시작한 통화였지만 마음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뛰던 다리처럼. 택시 안에서 나의 뛰는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속에 있는 마음을 다 꺼냈다. 내돈내산 콘텐츠를 찍는 유튜버처럼 내 마음 하나하나를 상세히 그녀에게 소개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친한 친구들한테 말도 못 하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그러면서도 너 생각나고, 보고 싶어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녔어. 전화 온 거 보고 심장이 쿵 하는 것도 싫었어. 싫은데 또 좋고.”
“미안해.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오빠 생각 매일 했어. 후회하기도 했고. 두려웠어. 나는 앱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처음이니까. 우리 고작 밥 한 번 먹은 사이였는데 이렇게 깊은 사이가 되어도 될까? 싶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오빠 진짜 괜찮은 사람인 거 아는데, 내가 지레 겁먹었었어. 근데 놓치면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전화한 거야. 나 제일 친한 친구들한테도 오빠 이야기하고, 전화 안 받았을 땐 나 차인 거 아니냐고 애들한테 얘기했다니까.”
그녀는 허준일까. 상처가 났던 자존감의 곳곳에 그녀의 말이 약초가 되어 상처를 치료했다. 자존감의 치유능력은 스위트홈의 괴물과도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 새살이 돋았다. 한파가 불어닥쳐 꽁꽁 언 나의 자존감에서 누군가 빙어 낚시를 하고 있었더라면 큰일 났을 거다. 10cm도 넘게 얼었던 마음의 강이 단번에 녹아버려서.
친구들과 카톡 한 내용을 캡처해서 보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더 찌질해지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했다. 혼자 김칫국을 너무 시원하게 들이켜서, 나의 행복과 꿈에만 집착해 그녀의 마음에는 집중하지 못한 것 같아서.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앞으로는 잘할게’라고 다짐했다. 해장술이 뭔지도 모르는 나였지만, 그녀에게 해장술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우리는 또다시 내일만을 위해 사는 커플처럼 ‘내일’ 만나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다. 집에 도착해 카톡을 보니 그녀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캡쳐해 보낸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이런 마음마저 통하는 걸 보니 ‘별다똑’이 맞군.
다음날 퇴근 후 투썸으로 가 그녀를 기다렸다. 정시에 퇴근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일상얘기만 단조롭게 하던 시절이 먼 옛날 같았다. 어제의 통화로 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과거를 깨끗이 청산한 듯 그녀와 데이트를 했다. 다시 보니 좋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사랑을 읽을 수 있었고, 나는 안도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녀와 카톡을 나눴다.
“오빠, 내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
“희희, 전화해줘서 고마워.”
시간이 흘러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고 우리의 1일을 언제로 할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투썸에서 만난 7/29, 희희가 전화해준 8/12, 다음날 데이트 8/13. 후보는 이 정도로 추려졌고, 잠깐 고민한 뒤 8월 12일을 1일로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가 울렸던 그 순간의 정적, 다시 전화를 걸어 통화를 나누었던 그 치유의 순간을 우리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재회는 우리의 시작이 되었고, 나는 행운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