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산도 정복해보자
위대한 모험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훌륭한 판단이 요구된다. 훌륭한 판단은 경험에서 나온다. 하지만 경험은 잘못된 판단의 누적에서 비롯된다.
- 산악인 제프 태빈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가을의 초입,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기분이 산뜻해진다. 무념무상이 이런 것일까? 머리를 비우기 위해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비워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뭘 좀 먹어야겠다.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먹는다. 아, 먹으려고 오르는구나. 전날 꽁꽁 얼려온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다. 콜라, 사이다, 맥주 다 필요 없다. 난 물만 있으면 돼.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른다. 희희와 함께. 삐쩍 마른 몸으로 잘도 오른다 희희. 대단한 녀석.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내 앞에서 걷던 그녀는 갑자기 쩌렁쩌렁 한 목소리와 요상한 동작으로 이렇게 외쳤다.
“산의 정기!! 땅의 기운!!”
희희와의 등산 데이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함께 느끼며 동시에 그 경이로움 앞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너무나도 내 취향인 유머 코드를 맞추는, 말 그대로 건강 데이트였다. 인왕산을 정복한 우리는 하산하며 입맛을 다셨다. 등산 데이트의 진정한 정상은 막걸리 아니겠는가. 칼로리를 불태운 자가 식당을 입장하는 모습. 관상의 수양대군(이정재)이 강렬하게 등장했던 그 씬과도 같다. 말 그대로 위풍당당.
“이모님 여기 비빔 막국수, 메밀전, 메밀전병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 주세요.”
워터야 미안해. 너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의 유통기한이 12시간도 안될 줄이야. 난 막걸리만 있으면 돼. 희희와 난 결도 잘 맞지만, 식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잘 맞았다. 맛있는 안주와 최적의 술. 파전엔 막걸리, 피자엔 치킨, 삼겹살엔 소주. 식성이 맞지 않는다면 내가 즐기는 것들을 강요할 수도 없었을 텐데. 신께 감사하는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담아 희희와 또 짠을 했다. 막걸리를 두 잔 정도 마셨을 때 메밀전병을 집어 든 희희가 내게 말했다.
“오빠는 나랑 결혼 언제 하고 싶어?”
“희희랑 결혼 빨리하고 싶지, 사실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는데.. 나 전세 계약이 내년 5월에 끝나거든. 근데 다음 집은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 신혼집이고 싶어.”
떨렸다. 내년에 결혼하고 싶은 생각을 혼자만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내 속내를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좋아~”
좋다고? 응? 오예. 됐어. 난 웃었고, 우리는 막걸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취기가 오르는 속도보다 우리의 대화 페이스가 더 빨랐다.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공개했고, (달마다 찍히는 세후 월급까지) 모아둔 자금을 털어놨으며, 막연히 갖고 있던 결혼식과 신혼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희희는 본인이 준비된 것이 없다며 미안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준비. 결혼을 위한 준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희희를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연애를 할 때 종종 결혼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마다 난 ‘아직 난 결혼할 준비가 안 되었구나’란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재정적으로나 마음으로나 말이다. 하지만 희희와의 결혼은 심적으로는 확신이 있었다. 재정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지금보다 더 잘 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희희를 만난 이후로 내 삶은 왠지 모르게(사실 희희 때문인 것을 알지만) 건강해졌고,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희희, 괜찮아. 준비에 대해 생각을 하면 결국 끝도 없을 거야. 우린 같이 살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희희와 다시 짠을 했다. 구체적인 날짜는 정하지 않았지만, 내년 가을에 결혼하자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날 데이트를 마저 즐기던 도중 희희는 부모님께 빨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인왕산과 막걸리를 정복한 그 날, 우리는 결혼이란 산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식장을 잡고, 신혼집을 마련하고, 서로의 가족과 왕래하며 자연스럽게 부부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인왕산 데이트를 떠올리면 희희와 나는 훌륭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난 지 한 달도 안된 우리가 그토록 결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던 걸 생각하면 피식 웃음도 난다. 짧은 기간의 연애였지만 결혼에 대한 확신이 생긴 이유에 관해선 설명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확신이 들었고, 훌륭한 판단을 했을 뿐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