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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웨이 Feb 14. 2021

9. 첫 다툼

서로의 치부를 공개하다

내 생각을 그대가 알아주길

더 이상의 추측은 사라지길

나의 과거를 그대는 모르네

우리 미래를 우리는 모르네

강물의 나뭇가지처럼 인생에 정체되어

조류에 휘말려 하류로 흘러가네

난 그대를, 그대는 나를 운반하리

영화 비포 선라이즈 中 


연애는 상대방과 나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는 성찰의 시간을 겹겹이 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취향을 나누고, 무의식중에 나온 결을 발견하며  시간을 쌓을수록 둘의 관계는 깊어진다. 상대방을 알게 되고, 나를 공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치부를 공개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한 지 약 3년이 되었다. 한때는 인스타그램을 정말 열심히 했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인친들과 영화 수다를 떠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인스타그램에 되고 싶은 나의 모습만을 공개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어렵겠지만 끊어내야 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찾기 위해서는. 그 뒤로 인스타그램은 가끔 유머 게시글을 보고, 식당이나 옷을 검색해보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다시 시작해보려고도 해봤지만, 예전만큼의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몇 번의 노력은 20여 개 되는 게시글을 남기는 것으로 끝이 났다. 


희희는 헤비유저는 아니었지만, 인스타그램 계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종종 희희의 계정에 들어가 그녀가 남겨 놓은 글들을 몰래 보곤 했었다. 그녀의 글은 오밀조밀하면서 담백했다.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희희 만의 아우라를 부드럽게 내뿜는 글이랄까. 희희 에게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하였다고 말했다. 희희는 나의 옛 피드들이 궁금하다며 아쉬워했다. 


어느 늦은 밤,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희희가 스토리를 올렸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스토리를 보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고,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희희가 굿모닝 인사를 하였다.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텍스트만으로도 전달이 되는 ‘쎄함’이 느껴졌다. 내가 혹시 뭘 잘못했냐고 물었다. 희희는 마음속에 담아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느낀 것을 바로 표현하는 스타일이다.  


“이 계정 오빠 계정 아니야?”


아, 어제 보았던 스토리로 나의 발자취가 남았구나. 그녀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그녀는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찝찝하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빠를 모르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안 좋아. 우리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오빠가 숨기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였고, 그로 인한 이 당황스러움이 싫어. 이거 말고도 내가 또 모르는 거 있는 거 아니지?” 


게다가 게시물 20개가 있는 나의 인스타 계정은 비공개였다. 서둘러 그녀를 팔로우했고, 오후에는 그녀와 찍은 사진을 올렸다. 희희의 당황함을 어떻게든 잠재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일단 만나야 했고, 퇴근 후 가로수길에서 희희를 만났다. 그녀는 표정으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그날 알았다. 두 손을 맞잡고 걸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텍스트로 느껴진 당황함과 당혹감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이런 날은 소주만 한 게 없지. 


“짠”


술잔을 부딪치며 나는 별 뜻 없는 계정이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했다. 얼굴을 보며 대화하니 희희도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했다. 그러다가 내가 인스타를 접었던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사실 난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멋지고 지적이며 위트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예능 PD 시험에 떨어진 능력 없는 취준생이었다. 그때 페이스북을 들어가면 동기들의 취뽀 소식들이 참 많았다. 배가 아픈 건 아니었지만, 이유 모를 화가 나를 엄습했다. 그 화는 내 자존감을 잡아먹었고, 페이스북을 떠나 인스타그램으로 왔다. 실제 지인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닌 낯선 인친들과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나로 탄생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짜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쪼잔해 보이고, 찌질해 보이기 때문이었는데 얘기를 듣는 희희의 눈빛은 빛났다. 그러다 희희도 본인의 치부를 하나 꺼내놓았다. 그렇게 치부 공개 타임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각자의 치부들을 쏟아냈다. 우리는 손을 맞잡기도,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기도 하며 서로에게 ‘괜찮아’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그날 테이블 위로 우리의 치부가 쌓일 때마다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고, 둘 사이 성찰의 깊이는 더욱더 깊어졌다. 희희의 치부를 알게 되었을 때 난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우리 진짜 연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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