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해요
봐주세요
나의 어색한 침묵을
나는 당신을 둘러싸는 공기가 되고 싶어요
당신 살갗에 맺히는 이슬이 되고 싶어요
다니카와 슌타로 <11월의 노래> 中
학창 시절 목소리에 자신 있고, 노래를 꽤 한다고 생각했던 남자라면 한 번 쯤 불러봤을 노래. 바로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 이다. 2001년, 김동률의 <귀향>이 나왔을 때 가사와 그의 음색에 빠져 winamp에 앨범 전체를 넣고, 무한 반복하며 들었다. 나도 목소리에 자신 있고, 노래 꽤나 한다는 착각 속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지라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무척이나 많이 불렀다. 명곡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그 존재감을 뿜어내기 마련이다. 이 노래 또한 그러하다.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노래를 종종 듣는 걸 보면 말이다. 특히 이 노래의 가사는 아직도 영롱하다.
희희와 안목해변에 갔을 때 우리는 모래사장에 잠시 누워있었다. 피부는 바람을, 눈은 태양을, 귀는 파도를 느끼던 순간이었다. 15분쯤 시간이 흘렀고, 몸을 일으켜 희희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함께 즐기고 있는 희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희희가 일어나면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장소와 타이밍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희희가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속으로는 사랑한다고 열 번도 넘게 되뇄지만, 이상하게 입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일어날까?”
“어? 그럴까? 커피 한 잔 때리러 가자!”
때리긴 뭘 때려.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못한 주둥아리를 때려버리고 싶었다.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끝끝내 희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희희를 집에 내려다 주고, 역시나 그녀의 뒷 모습을 찍은 뒤 집으로 오는 길에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희희에겐 하지 못했던 말을 노래를 따라부르며 마음껏 소리쳤다. “사랑해!! 난 맘으로 하고 싶은 말!!! 나 아끼고 아껴서 너에게만 하고 싶은 그 말!!!!!!!!” (이날 혹여나 사고가 나서 누군가 나의 블랙박스를 보았다면, 김동률의 열혈 팬으로 오해했을 만큼)
그 이후로 어떻게든 희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안목해변의 아름다운 바다가 주는 낭만은 없겠지만, 적어도 낭만과 멋짐을 더해서 선물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낭만과 멋짐을 더하기는 쉽지 않았다. 막상 타이밍을 잡으려고 생각하니 타이밍이란 놈은 집을 떠나 가출한 비행 청소년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희희와 자기 전 통화 타임(보통 자기전에 우리는 영상통화나 통화를 한다)을 갖고 있었다. 통화 타임의 바이브는 때마다 다른데 그날의 바이브는 유쾌함이었다.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희희를 사랑한다고.
멋쩍어진 나는 안목해변에서부터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는 것부터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됐을 말들이다) 그리고 희희가 물었다.
“오빠 근데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
잠시 정적이 흘렀고, 5초 정도 흐른 뒤에 대답했다.
“글쎄, 맛있는 거 먹을 때 생각나는 거?”
우리는 피식 웃었다.
희희와 통화를 마치고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난 왜 희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질문들이 떠올랐다. 명쾌하게 또는 논리적으로 근거를 하나하나 들면서 위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희희와 나는 광활한 초원 위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웃긴 했지만 실제로 맛있는 걸 먹을 때면, 분위기 좋은 장소를 발견할 때면, 내가 행복할 때면 항상 희희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바닷가도 아니었고, 통화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어떤 불안이나 걱정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웃으며 가볍게 말했지만 쉬운 글이 쉽게 쓰인 글이 아님을 희희는 알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