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다친 일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잘못됐다고 생각, 아니 느꼈다. 파도에 떠밀려 뭍으로 나온 뒤 나는 비명을 질러댔다. '무릎이 꺾인 것 같은데?' 라고 잠깐 사고에 대한 자각을 했지만 자각은 잠시뿐 밀려오는 파도보다 더 강하고 빠른 속도로 고통이 날 덮쳤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바닷물에 질펀하게 적셔진 모래바닥을 연신 내려쳤다. 마치 부상으로 교체가 필요한 축구선수가 그라운드를 파닥파닥 내리치며 팀닥터를 긴급하게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서핑 강사였던 Ditto는 팀닥터처럼 내게 급히 달려와 물었다. "Hey, Are you okay?"
"Your bones look fine" 의사가 말했다. 그 뒤에 의사는 인대가 파열된 것으로 보인다는 자신의 소견을 덧붙인 것 같았다. 나의 여행 메이트인 K는 내가 못알아들은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통역을 해주었다. "MRI를 여기서도 찍을 수 있지만 비용이 비쌀거라고 하네, 한국에서 MRI를 찍고 일단 여기서는 무릎 보호대랑 목발 그리고 진통제를 처방해준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Yes, I'm gonna take MRI in Korea. Thanks" 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의학용어 영단어는 공부해본적이 전혀 없는데 오늘 제대로 공부해간다잉" 오늘 통역가이자 나의 휠체어 드라이버로 수고한 K에게 말했다.
우버를 타고 병원에 도착해서 개인정보를 영어로 작성한 뒤 간호가사 와서 혈압을 측정하며 다친 경위에 대해서 물었고 무리 없이 잘 대답을 했다. '나 그래도 영어가 많이 늘었는데?' 다친 와중에도 내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지만 간호사의 뒤이은 질문을 나는 알아듣지 못해 벙쪄있었다. 그때마다 K가 나타나 "형, 저릿저릿한 정도는 1부터 10정 중에 몇 점이야?" 등으로 통역해줬다. 살면서 '저릿저릿 하다'라는 단어를 공부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관절, 연골 심지어는 정형외과도 영어로 뭔지 난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단어를 잘도 알아듣고 바로바로 한국어로 통역해주는 K가 깔쌈해보였다.
생각해보니 해외에서 병원을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급하게 찾은 것 치고 BIMC 종합병원은 생각했던 것 보다 꽤 컸고, 직원들과 간호사들은 친절했다. 또 생각보다 더 많은 내 친구들 -발리에서 다친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이 있었다. 대게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쉼과 힐링을 얻으러 떠난 발리에서 다쳐서 병원에 온 신세라니, 쉬이 웃음이 나질 않는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K와 나는 진료를 기다리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유부남 둘이 떠난 발리여행에서 한 사람은 휠체어에 한 사람은 병원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K는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휠체어에 앉아있는 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고, 그 사진을 보며 우리는 낄낄 거리며 웃었고 와이프에게도 사진을 전송했다.
이후 긴 기다림 끝에 목발과 XXL 무릎 보호대 그리고 약까지 받았다. 한화로 약 48만원이 들었다. 진료비는 25만원. 약과 그 외 것들이 23만원. 황금 보호대와 목발이 아닌 금발을 장착하게 된 나는 K와 함께 호텔로 들어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서핑을 마치고, 맛있는 나시고랭을 또 흡입한 뒤에 비치클럽에 가서 신나게 음악에 몸을 맡기고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렸어야 했다.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둘째날 저녁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호텔에서 빌린 낡은 휠체어와 함께. 호텔 식당은 옥상에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는데 인도의 4인 가족이 열심히 수영을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K와 나 우리 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맥주를 주문하고 나시고랭과 함께 몇 가지(약 5개의)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다. K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저녁을 내가 샀다. 저녁을 먹은 뒤 맥주 한 병씩을 더 주문하고 썬베드에 앉았다. DJ가 디제이컨트롤을 만지며 한국에서 온 유부남 두 명과 인도의 4인 가족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쿵짝쿵짝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인도에서 온 남매는 물장구를 더 세게 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방으로 튀긴 수영장 물이 바닥과 K 그리고 나를 덮쳤다. '그래, 이게 pool party지?' 란 생각으로 K와 건배를 했다. 음악은 더 신나졌고 비트는 빨라졌으며 진통제 약 기운이 온 몸에 돌며 고통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기분 좋아진 나는 K에게 말했다. "치노팬츠를 입은 DJ중 가장 실력이 좋은 DJ같은데?"
그렇게 휠체어와 목발신세를 지게 된 우리는 남은 3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는 잠시 잊고 미니 pool party를 마저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