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계획대로 되겠어
F성향이 강한(MBTI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다) K(ENFP-활동가)와 나(INFP-중재자)는 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름 구글 스프레드시트도 만들었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미리 시트에 적어둔 뒤에 그중에서 베스트 옵션만을 골라서 알찬 발리 여행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 그 시트에는 우리가 묵을 숙소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비록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원하는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신나게 마시고, 맛있게 먹고, 즐겁게 춤추고, 스스름없이 어울리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발리에서 서핑하다 후방십자인대 파열이 되는 것도 당연히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3일이 남았다. Plan B가 필요했다. 사실 나는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고, K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발리를 즐기길 바랐다. 발리의 교통정체는 상상이상으로 끔찍해서 우버 바이크를 불러서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이 다리로는 도저히 바이크를 탈 수 없었다. 바이크는커녕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나는 조용히 빠져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K에게는 내가 혼자 호텔방에 있는 것은 옵션에 있지 않았다. K는 리셉션에 가서 어제 빌린 휠체어를 체크아웃할 때까지 쓸 수 있는지와 휠체어와 함께 외출해도 되는지 물었다. 친절한 리셉션 직원분이 활짝 웃으며 "Sure"이라고 대답했다. 휠체어를 타고 발리를 누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누가 이런 경험을 해봤겠는가? 생전 처음 하는 경험 그리고 상상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러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자 신세계라고 할 정도의 새로운 경험이 확 줄어들었다. 진짜 새로운 경험은 많지 않다." 장강명 작가의 <5년 만에 신혼여행>을 읽다가 메모해 둔 문장이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경험을 할 일이 정말 없었다. 새로운 사람, 환경 심지어 먹는 것 까지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선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테니스를 새로 배우고, 이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이미 경험했던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아이언맨이 죽고 난 이후에 마블 시리즈처럼 캐릭터와 배경이 조금씩 바뀌더라도 결국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거기서 거기란 생각이 드는 것처럼.
휠체어로 누비는 발리. 이것만큼은 달랐다. 사전 정보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비디오를 찍으며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 이 경험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찍어 둔 영상을 보니 마치 언터처블 1% 우정의 두 주인공 같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도보 5분 거리의 카페였다. 힘차게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휠체어를 끌고 길을 누비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주 작은 턱이나 울퉁불퉁한 도로를 만날 때면 우리는 사고라도 난 듯 그 상황에 맞게 대처를 해야만 했다. 건강했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던 작은 턱과 울퉁불퉁한 도로는 살짝 과장을 보태어 음주 운전자 같이 느껴졌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직면했으며, 직면한 순간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피해 가야만 했다. '얼마나 힘들까?'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환자들이 느꼈을 이 폭력적인 상황과 그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던 무력감 또 그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 그리고 댓글들 앞에서 느꼈을 소외감까지, 날 공격했던 파도처럼 순식간에 그 모든 감정들이 날 덮쳤다. 이기적으로 살았구나 싶었다. 솔직히 난 꽤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남의 기분과 상태를 살피면서 동시에 언행을 신경 썼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은 내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이기심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였다. 정작 다치고 나서야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나서야 난 작은 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상시 쉽게 넘어섰던 턱이 누군가에게는 어렵사리 넘어야 할 턱이었음을 알아차릴 턱이 없었다.
걸어서 5분 거리의 카페를 10분 정도 걸려 도착했고 우리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 두 개를 주문해서 먹었다. 이후 계획이 또 필요했다. K는 비치클럽에 가자고 했고, 나는 무리라고 했다. K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다며 우버택시를 불렀고 어느새 나는 절뚝거리며 택시에 올랐다. Finns에 도착하자마자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하늘에 떠 있는 구름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흥에 취해있었다. 게다가 입구로 우리를 안내해 줄 가파른 계단이 최소 20개는 되어 보였고 그 어디에도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나만큼 덩치가 좋은 경비원 두 명이 계단 앞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던 K와 내게 다가왔다.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그들은 휠체어 옆에 딱 서서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K와 눈을 맞추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고, 고개를 끄덕인 뒤 숨을 흡-하고 들이마셨다. 들이마쉼과 동시에 건장한 체격의 세 남자는 내 휠체어를 들어 올렸다. 그들도 느꼈을 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죄 없는 시시포스였다.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묵묵히 바위를 산 정상에 옮기듯 나를 계단 위로 옮겼다. "Thank you so much"라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K와 나는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K는 내 텐션을 걱정하며 술을 주문했고, 생전 내게 술을 권하지 않았던 K는 "형 마셔!"를 연신 외쳤다. 시시포스의 형벌이 끝나고 파티가 찾아왔다. 쿵쾅거리는 음악은 국도를 달리다 고속도로로 진입한 듯 보였고, 넘쳐나는 사람들과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나는 군중 속에 고독을 느꼈다. 그 고독을 없애려 K와 다시 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