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 먹어요.
언터쳐블 1% 우정의 한 장면처럼 Finns 비치클럽(World's Best Beach Club, 그곳의 캐치프레이즈다)에 들어왔지만 K가 원하는 우리의 모습은 언터쳐블이 아닌 다이나믹 듀오였다. 누가 최자를 할지 정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내가 최자지'라는 생각을 몰래 하며 술을 마셨다. 마신 술이 점점 늘어났고, 늘어나는 술만큼이나 사람 또한 늘어났다. 조금씩 흥이 오른 K는 좀 돌아다니자고 했고 나는 그러라고 답했다. K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풀었다.
일찍이 술을 마시고 있었던 서양인으로 가득 찬 비치클럽을 K와 나는 휠체어를 타고 말 그대로 누볐다. 하필 휠체어를 탄 나의 얼굴의 높이가 앉아서 또는 누워서 놀고 있는 대다수의 서양 친구들의 눈높이와 기가 막히게 일치했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I(내향적인)인 나는 먼 산만 바라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휠체어를 타고 온 나를 보며 '으잉?'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휠체어로 누비는 시간과 거리가 늘어나면서 날 바라보는 눈빛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이 변화해 가는 것을 느꼈다. 1단계 '당황, 어찌할 바를 모름'에서 2단계 '격려, 응원해 주기'로 서서히 변해갔다. 그들의 눈빛이 변해가며 행동도 변해갔다. 그들은 내게 하이파이브를 건네거나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의 메시지를 말없이 건넸다. 47살 호주인이라고 자기를 소개 한 어떤 누님은 내가 장애인인 줄 알고 다가와서 그녀가 장애인 올림픽에서 춤으로 봉사 한 일화를 얘기해 주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비치클럽의 주인공이 되라며 내 눈을 바라보고 소리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단순히 내가 I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나를 향해 짓는 수많은 사람들의 당황스러운 시선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던 거다. 그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은 날 당혹게 했고, 당혹스러운 나는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던 거다. 특히 일상적인 장소가 아닌 비치클럽이라는 상당히 특수한 장소였기 때문에 나는 더 힘들었다. 왠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처럼 아프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입장권이 있어도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멸시의 눈빛을 받는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거리를 활보하면 주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수군 대면서 주인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장면.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과한 연출로 표현된 씬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멸시를 받는 주인공의 상황을 간접적 아니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 같았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그래도 나는 견딜만했다. 금세 적응도 했다. 왜냐면 나는 잠시 부상당한 것일 뿐이고, 치료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비치클럽에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바로 화장실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즐겁게 마시질 못했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K에게 부탁해야 했고,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까지 먼 여정을 떠나야 했다. 화장실 안에서 마주하는 멀대 같은 서양 친구들의 시선이 괜히 불편했고, 볼일을 다 볼 때까지 날 기다려야 하는 K와 휠체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적응을 하고 나서는 볼일을 보면서도 그들과 눈빛으로 "Whassup"이란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편해졌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처음엔 내가 괜히 이런 곳에 와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동시에 '가장 불편한 것은 나라고 이것들아!'라는 반항심도 생겨났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눈 마주침에도 누구 하나 당황하는 눈빛을 지속하는 사람이 없었고, 어떻게든 날 배려해 주려고 애쓰는 눈빛을 모두가 보내주었다. 그런 그들의 노력과 배려를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박차고 자리를 일어나 절뚝이며 비치클럽을 나왔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어떠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까? 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러한 고민들을 World's Best Beach Club인 곳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때때로 오해가 생겨 다투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이 담긴 시선과 곡해 없는 수용이 아닐까 싶다. 진부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태도가 아닐까? 안온하고 평화로운 눈빛과 친절은 진심이 담기면 결국 통한다는 사실을 이미 진부해진 노랫가사 같지만 초콜릿처럼 자주 꺼내 먹어야 하지 않을까?
비치클럽의 군중들과 분위기에 적응을 완료한 뒤, K와 나는 메인 댄스플로어 옆에서 어깨를 덩실거리며 춤을 추기도 했고 석양이 잘 보이는 곳에 휠체어를 주차해 둔 뒤 칵테일을 마시기도 했다. 그제야 제대로 비치클럽을 즐기는 기분이 들었고, 우리는 이런저런 칵테일과 술을 주문해 마음껏 취하고 춤을 추었다.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윈드밀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밤이 깊었고 다리에 통증도 조금 올라왔을 때 K와 나는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최초 입장 시 느꼈던 내게 향했던 불편한 시선들이 흥겹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뀐것을 알았기에, 집으로 갈 때는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스톤이 마지막 장면에서 눈빛으로 인사를 나눴던 것처럼 그들에게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고마웠고,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