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부. 제4이통사를 찾아라
두 번의 탈락에도 KMI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시장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회의론이 퍼졌지만, KMI는 스스로를 ‘정책의 실험대’로 자처했다. 이들이 세 번째 출사표를 던진 것은 2011년 여름이었다. 그 무렵 중소기업중앙회가 새로운 제4이통사업 추진을 공식화하면서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방통위가 와이브로의 재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있던 시기였기에, 시장은 다시 한 번 긴장했다.
7월 18일, 중소기업중앙회 이사회가 제4이통 사업권 확보를 추진하기로 의결하면서 판이 커졌다.1) 이로써 제4이통 사업권을 놓고 KMI와 중기중앙회가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다만 시장은 정면충돌보다는 협력을 기대했다. 이미 두 차례 탈락을 겪은 KMI가 자금력과 주주 구성의 불안정으로 신뢰를 잃은 상황이었고, 중기중앙회 역시 단독으로 전국망을 구축할 만큼의 재정 여력은 없었다. 따라서 두 진영이 통합된 ‘그랜드 컨소시엄’ 형태로 합치는 방안이 거론됐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양측은 끝내 협력 대신 반목의 길을 걸었다. 그 중심에는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있었다. 양 전 장관은 전자교환기(TDX)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 개발, 그리고 삼성전자와의 와이브로 상용화를 이끈 주역이었다. 한국 통신 인프라의 상징적 인물이자 와이브로의 산증인이었다. KMI는 애초 그가 합류하면서 기대감을 높였지만, 내부 경영권 갈등이 불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KMI 측은 양 전 장관이 “경영진 일괄 퇴진”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물러났다고 주장했다. 반면 양 전 장관 측은 KMI가 그랜드 컨소시엄 구상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탈했다고 반박했다.
결국 그는 중소기업중앙회 진영으로 옮겨 ‘인터넷스페이스타임(IST)’이라는 새로운 컨소시엄을 출범시켰다. 같은 기술, 같은 목표, 다른 진영이었다. 갈등은 점차 감정전으로 번졌다. KMI는 양 전 장관이 KMI 내부 자료를 토대로 유사한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영업비밀 침해 및 겸업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2) 대선 정국과 맞물리며 특혜 논란이 일었고, 제4이통 사업은 순식간에 정치적 프레임 속으로 휩쓸렸다.
이 와중에도 방통위는 절차를 이어갔다. 시장 수요가 존재했고, 와이브로 정책을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2011년 10월 19일, 방통위는 2.5GHz 주파수 40MHz 폭을 대상으로 한 와이브로 사업자 신규 허가 공고를 냈다. 7년간 3G 또는 4G 기반의 와이브로 서비스를 제공할 사업자 1곳을 선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접수는 11월 18일까지였다. 마감 하루 전인 17일, KMI가 먼저 신청서를 제출했고, 마지막 날에는 양승택 전 장관이 이끄는 IST가 접수를 마쳤다.3) 당초 IST는 현대그룹의 투자 검토 소식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심사를 앞둔 12월 12일 현대그룹이 전면 철회하면서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4) 자금력을 이유로 이미 두 번 낙마한 KMI 역시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12월 16일, 방통위는 양측의 사업계획서를 심사한 뒤 동일하게 ‘부적격’을 통보했다.5) KMI의 점수는 65.8점, IST는 63.9점. 기준 점수 70점을 넘지 못했다. 이유는 반복됐다. 주주 구성의 취약함, 재정 능력의 부족, 사업 실행의 불확실성. 양측 모두 시장의 벽을 넘을 만큼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전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2년 12월 27일, 방통위가 다시 와이브로 사업자 공모를 내자 KMI는 네 번째, IST는 두 번째로 신청서를 제출했다.6)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2013년 2월 1일, 방통위는 양측 모두 부적격 결정을 내렸다. KMI의 총점은 64.210점, IST는 63.558점. 평가 항목과 점수 모두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7)
방통위 석제범 통신정책국장은 “KMI는 향후 5년 내 800만 명 가입자 유치 등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을 제시했다”며 “영업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계획은 향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제4이통의 불씨는 사실상 꺼졌다. 와이브로는 LTE의 급속한 확산에 밀려 기술 경쟁력을 잃었고, 정부의 산업정책 기조 역시 ‘경쟁 촉진’에서 ‘시장 안정’으로 이동했다. 유효경쟁정책이 완전히 폐기된 이후, 정부는 완전한 신규 사업자 대신 알뜰폰(MVNO) 확대를 통해 부분적 경쟁을 유도하기로 했다. KMI가 꿈꾼 “독립형 네트워크 경쟁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들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재판매 사업자의 제도적 확대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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