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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uper Work

완성이 목표가 아니라 단계가 되는 시대

꼼꼼히 기획해서 실수 없이 완성하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by 유호현

꼼꼼함의 시대: 단 한 번의 완성


1975년에는 어떻게 일했을까? 타자기 앞에 앉은 직원이 심호흡을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친다. 오타 하나면 처음부터 다시 쳐야 한다. 프로그래머는 펀치카드를 한 장 한 장 뚫으며 긴장한다. 잘못 뚫으면 프로그램 전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은행원은 주판을 튕기며 장부를 정리한다. 1원이라도 안 맞으면 퇴근할 수 없다.


완성은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완성은 두려운 목표였고, 도달하면 끝이었다. 실수는 곧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의미했기에, 모든 과정이 꼼꼼했다. 한 땀 한 땀, 한 글자 한 글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기획의 시대: 끝없는 다듬기


2025년 초, 디지털 시대. 보고서를 쓰고, 검토받고, 수정한다. 코드를 짜고, 버그를 잡고, 리팩토링한다. PPT를 만들고, 피드백받고, 다시 만든다. v1, v2, v3... 최종, 진짜최종, 진짜진짜최종.


Ctrl+Z 덕분에 실수는 되돌릴 수 있게 됐다. 수정의 자유가 생기면서 기획이 중요해졌다. "어떤 구조로 갈까", "어떤 톤으로 쓸까", "어떤 디자인이 좋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완성은 여전히 하나의 목표다. 아무리 잘 기획하고 수정해도 결국 하나의 완성본을 만들어야 한다.


완성은 기획하고 수정할 수 있지만, 여전히 최종 목표다.


반복의 시대: 매일의 완성


AI 시대인 지금, 나는 매일 무언가를 완성한다.


아침에 책의 한 챕터를 완성한다. 학술적 톤으로. 점심 먹고 같은 내용을 에세이로 다시 완성한다. 저녁엔 10대 독자용으로 또 완성한다. 각각이 완성본이다. 초안이 아니라.


정치 플랫폼에 새 기능을 추가한다. 오늘은 투표 시스템을 완성해서 배포. 내일은 토론 기능을 완성해서 배포. 모레는 AI 조언 기능을 완성해서 배포. 매일이 런칭이다.


대학 강의안도 마찬가지다. 월요일 강의를 완성하고, 학생 반응을 보고, 수요일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을 완성한다. 이론 중심에서 실습 중심으로, 케이스 스터디에서 프로젝트 기반으로.


완성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의 루틴이 됐다.


완성이 목표가 아닌 단계가 되는 시대


꼼꼼함의 시대엔 완성하면 끝이었다. 기획의 시대엔 완성까지가 고통이었다. 반복의 시대엔 완성이 시작이다.

오늘 완성한 버전을 보고 "다른 관점으로도 해보자"고 생각한다. 사용자 피드백을 받고 "이런 방향도 있구나"를 깨닫는다. 완성본이 다음 완성본을 위한 프로토타입이 된다.


이틀에 한 번씩 책 전체를 다시 쓴다. 매일 새로운 기능을 배포한다. 매주 강의를 재설계한다. 완성이 압박이 아니라 실험이 됐다. 부담이 아니라 놀이가 됐다.


처음엔 허무했다.


2년간 공들여 쓴 책의 묵직함, 밤새 코딩해서 완성한 프로그램의 뿌듯함이 사라졌다. AI가 순식간에 완성본을 만들어주니, 마치 직접 등산하려다 케이블카를 탄 느낌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한 번의 등산이 아니라 매일 다른 산을 오를 수 있게 됐다. 오늘은 북한산, 내일은 설악산, 모레는 지리산. 각각의 경험이 쌓여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됐다.


7개의 직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연구원에서 보고서를 완성하고, 그 인사이트로 강의를 완성하고, 그 경험으로 컨설팅을 완성한다. 완성이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는 디딤돌이다.


AI 스케일의 삶은 덜 하는 게 아니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다양하게 완성하는 것이다.


꼼꼼함의 시대엔 "실수하지 말자"였다. 기획의 시대엔 "완벽하게 만들자"였다. 반복의 시대인 지금은 "일단 완성하고 보자"다.


지금 우리가 "한 번도 수정 없이 한 번에 완성했다고요?"라고 놀라듯이, AI 시대에는 아마 "한번만 돌려보고 만든거에요?"라고 놀라워 할 것이다.


완성이 목표가 아니라 단계가 되는 시대. 우리는 이제 완성 이상의 목표를 가져야 한다. 오늘도 무언가를 완성하고, 내일은 그것을 딛고 또 다른 무언가를 완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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