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새벽 5시 기상, 5시 반에 집에서 나서면서 이어폰을 꽂으며 자기 암시로 시작한다. "잘하고 있어."
챗GPT를 켜고 영어회화를 연습한다. 그냥 계획 없이 그날 있었던 일을 일기처럼 영어로 말하거나, 혹은 최근에 론칭한 프로젝트에 대해서 간단하게 영어로 설명하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선 지하철 역에 들어가면 어린이집 식단표와 일정을 확인하고, 이모님 1, 2,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달할 아이 돌봄 관련 유의사항과 투약의뢰서를 전송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는 출근 전 모드를 켜고 투자 관련 정보도 확인하고, 뉴스도 읽는다. 전날 퇴근시간에 나만의 콘텐츠 감상 시간을 못 가졌을 경우 영화를 한 편 보기도 한다. 뭐라도 봐야 그날 동료들과 할 말이 있다. 회사에 가서 퇴근 후 살림하고 아이를 돌봤던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요즘 뭐가 유행하는지, 어떤 이슈가 있는지 정도는 파악해 두어야 한다.
회사에 가면 옆에 너무 훌륭한 동료분들이 같이 일하고 있다. 그들에게 딱히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누를 끼치기는 싫다. 딱 그 정도를 목표로 미친 듯이 일만 한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몇 번 해보면 익숙해질 수 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많은 배려 속에 받은 업무는 완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응했지만, 매일 야근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 또 업무시간 외에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상황에서, 새벽 출근과 동료보다 이른 퇴근을 반복하는 건 고문이다. 직무 특성상 개발이 한창 진행되면 병목이 되지 않기 위해 혹은 개발자의 야근을 줄여 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일을 앞에서 당기기 위한 야근이 필요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열 번 오면 두 번 정도 몰아서 야근을 하며, 나머지는 업무시간 중에 더 급한 쪽을 빠르게 해치우는 데 집중하며, 아침 일찍 출근해서 해결하며, 그렇게 버티고 있다.
기획서가 완성되기도 전에 QA 일정이 잡히고, 개발일정이 확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일을 마이크로 단위로 쪼개어 우선순위 단위로 미친 듯이 빠르게 쳐내는 것뿐이다.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도 줄여야 하고, 불필요한 일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한다. 여기서 맡은 일을 쳐내면, 저기서 사과할 일이 생긴다. 회사에서 일을 좀 더 완성도 있게 기한에 맞춰 하려면, 이모님께 사과를 구해야 하고, 남편에게 스케줄 조정을 부탁해야 한다. 모든 걸 다 잘하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야근하면서 동료들과 대화하던 20대 후반 ~ 30대 초반의 그 시간이 추억으로 느껴질 정도다.
미친 듯이 일을 쳐내다 보면 어느덧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구내식당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해결하지 않는 날이 없어서 가끔은 지겨워지기도 하지만, 가끔 야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기에, 예측 가능한 일상이 소중해진다. 퇴근길엔 다음날 새벽배송을 받아야 하는 이유식 재료와 생필품 주문, 아이 옷 주문, 당근 거래 연락 등을 또다시 우선순위에 입각해 해치우고, 드디어 남는 시간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나를 위한 쇼핑을 한다. 이마저도 정말 감지덕지다.
이렇게까지 치열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나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그럼 그들이 뛰어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걸 곧바로 깨닫게 된다. 날때부터 뛰어난 사람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지가, 꽤 되었다.
경기가 어렵고 이직시장은 얼어붙어 있다. 이럴 때일수록 도피는 답이 될 수 없다. 야근이 싫어서 이직하고 싶어도, 살아남은 회사 중 야근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자기 발전하기 좋은 시절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젊은 친구들을 중심으로 탑티어 외에는 괜찮은 일자리가 없어 정규직으로 직장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가속화될 것 같다. 그러니 나와 동년배인 30 중반~40대 이상의 실무자들의 단련의 시간들이 더 오래 일할 환경을 만들 것이고, 당분간은 그들이 기업을 움직일 것 같다.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무형의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한 번쯤 목적의식을 갖고, 치열하게 끝까지 가보면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평생을 이렇게 달린다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젊은 시절, 가능하면 빠른 시기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극복할 수 있다 혹은 이미 극복했다고 믿고, 그 상태로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액션을 끝까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보는 경험, 그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라고. 남편이 바쁘고, 직장이 멀고, 친정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워킹맘이지만, 어떻게든 복직해서 하루라도 더 커리어를 이어가길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고, 이모님을 두 분 고용해 가면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다고. 그리고 나는 이제 시작이라고. 내 커리어도 이제부터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