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시작할 수 있는 용기

by 아마추어 진화기

아주 오랫동안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기분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내일모레면 사십 줄이 되어가는 나이가 재촉하는 것도 아니오, 들에 서리가 내려앉듯, 생각이 모여 얼게 된 계절이 온 탓도 아닌, 우리 아버지가 얼마 전에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느리지만 한발 한발 옮겨 가는 내레이션이 좋았다. 끝도 시작도 없이 일상의 매듭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평범함이 가슴 떨리게 반가웠다.



아버지는 이가 몇 개 깨어졌더래서 며칠 기다려 볼 참이었지만 어지간히 아팠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언니가 왜 아직 병원에 가지 않았냐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조금은 뚝뚝한 언니의 그런 재촉이 아버지는 기분 좋은 자랑거리 인양 몇 차례 반복하셨다.

'언니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빨리 가라고.'

병원에 갔더니 생각보다 간단한 처치 만으로 통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헛헛한 웃음으로 짧게 마무리되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는 분이셨다. 타인들이 오가는 관광지에서의 삶은 아버지의 침묵을 더 밀도 높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에 타지로 떠나오면서 지금까지도, 아버지와의 통화가 5분을 넘긴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의 숨이 조금씩 옅어져 감을 알게 되고, 주중에는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이 아버지께 전화를 하자 생각했다. 흡사 배드민턴 초보자들이 조금 더 랠리를 연장하기 위해 상대에게 조심스레 공을 넘기듯, 간단한 안부와 날씨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목소리로 풀어낸 저 짧은 이야기는, 적절한 온도와 습도로 오래도록 움트지 못했던 나의 내면을 보듬어 주었다. 안으로만 고집스럽게 내달렸던 나의 목소리가 침묵과 같은 무게로 저항하고 있었던 그 단단한 껍질이 드디어 물을 머금고 틈을 보인 것이다. 어색하고 미흡한 울림일지라도, 허공에 따뜻한 에너지 하나를 더해낼 수 있다면, 이제는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삶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임을 깨닫게 해 준 순간이었다.


때로는 아버지와의 통화가, 늙고 병든 아비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는 막내딸의 죄책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지만, 나는 그 시간을 정성스럽게 품으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시작한 그 이야기가 끊이지 않도록, 내 목소리로 이어가려 한다. 더 이상 맴돌지 않고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이제는 내가 지켜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