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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주혜 Aug 10. 2022

세탁기가 주는 위로

하얀 옷을 입은 날엔 어김없이 무언가를 묻혀온다. 상습적이기에 흰 옷을 입을 때면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곤 하지만 흰 옷에 얼룩 없이 무사히 귀가하기란 내게 왜 그리 어려운 것일까.


이제는 그냥 흰옷을 입은 날에는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처럼 빨랫비누와 얼룩제거제를 이용해서 최선을 다해 흔적을 지우려 애를 쓴다. 이 옷을 다시 못 입게 될까 봐 초조해했던 마음도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 옷의 존속 여부를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흰옷을 꺼내 입는 날에는 혹시 이게 이 옷과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의미심장한 각오를 다지게 만들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흰옷에 커피 얼룩을 묻힌 채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오기 전까지는 흰옷에 얼룩을 묻히고 다녀야 하는 어쭙잖은 부끄러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가 귀가하는 순간부터 옷에 묻은 얼룩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부끄러움의 자리를 대신한다.


커피와 흰옷의 재질이 궁합이 맞았는지 도무지 옅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룩제거제로 연신 문지르고 비벼 빨아대니 희끄무레하게 변하긴 했지만 마지막 희망을 세탁기에 걸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비장의 무기처럼 쓰는 표백제를 넣고 세탁기를 켰다. 애정이 있던 옷이어서 그랬을까... 그날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쪼그려 앉아서 그 흰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탁기 종료음이 울릴 때까지 앞에 앉아본 건 처음이었다. 내가 쳐다보고 있다 하여 이 얼룩이 없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하얀 거품과 뒤섞여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을 보고 있는데 나는 그 옷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나도 저 빨래처럼 세탁기 안을 들어갔다 나오면 내게 묻어있는 마음의 얼룩들이 지워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그런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상처받은 마음, 지우고 싶은 기억들, 켜켜이 쌓인 슬픔들을 씻어내 주는... 적어도 그런 마음의 세탁기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완전히 그 감정의 얼룩들을 지울 수 없을지라도 옅어져서 나올 수 있다는 '기계적 약속'이 보장되니 말이다.


옷에 묻은 얼룩을 지워주는 제품은 꽤나 있는데, 마음의 얼룩을 지워주는 그런 방법들은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상처는 지워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치유의 경험으로 덮이는 것일까? 애초에 사람 마음에 남은 얼룩이란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그 무엇인 걸까.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의 얼룩의 농도가 옅어짐을 경험하곤 한다. 그래서 그것이 괜찮아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시간의 힘을 빌려 고통의 옅어짐을 기다리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선명해지고 짙어지는 마음의 얼룩들도 있다. 그럴 땐 시간의 힘이 무색해진다. 내 마음의 얼룩은 전자 일지 후자 일지 생각하다가 둘 다 썩 마음에 내키는 선택은 아닌 듯하여 관두게 되었다.



여전히 세탁기는 열심히 세팅된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 앞에 앉아 세탁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탁기는 거품을 빼낸 후 일정량의 물을 넣고 헹구는 과정을 세 번 반복할 것이다. 그러고나서 물기를 빼면 경쾌한 알람 소리로 제 임무를 마쳤음을 알려줄 것이다. 심지어 세제와 함께 넣어놓은 섬유유연제는 빨래에 향기까지 입혀서 자신을 꺼내 주길 기다린다. 그 빨래가 몹시나 부러워졌다. 얼룩도 빼고 향기도 입고 다시 나오는 그 빨래가 부러워서 세탁기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마음의 얼룩을 어떻게 씻어내야 할까. 어쩌면 내 마음에 묻어버린 얼룩들은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하나의 무늬일지도 모른다고... 완전히 씻어내려 하는 데에 몰두하게 된다면 얼룩에 압도되어 그 얼룩을 입고 있는 '나'라는 본질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자칫하다가는 평생 그 얼룩을 지우는 사투를 벌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시간의 힘과 더불어 내 안에 남아 있는 얼룩들로 어쩌면 나만의 멋진 무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얼룩 위에 덧 씌워질 앞으로의 삶의 경험들은 나의 마음의 얼룩을 기반으로 하여 그려나가 질 테니 말이다.



알람음이 울린다. 세탁기는 알람을 끝내고 제 스스로 전원을 'off'해버렸다. 오늘따라 이 세탁기가 세상 멋있게 보인다니 참 별일이다. 커피 얼룩이 지워졌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꺼내본 하얀 블라우스에는 옅은 커피 자국이 남아있었다. 내가 참 애정 하는 옷이었는데... 나에게 '세탁기에 대한 명상'을 남겨주고 떠나버렸다. 오늘이 마지막인줄 알았더라면... 나는 다른 옷을 꺼내 입었으려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얼룩이 묻은 블라우스를 보면서 이유모를 '괜찮음'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다고... 나의 마음의 얼룩 또한 괜찮다고... 이 얼룩 또한 나만의 무늬가 되어줄 거라고... 예상치 못한 세탁기의 위로는 그날 내 마음의 얼룩을 조금 옅게 만들어준것만 같다.


고마워. 세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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