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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E열 Jun 12. 2020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화 <벌새>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벌새>, 김보라 감독, 2019.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나’를 조명한다.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면서도 어딘가 닮아 있다. 어쩌면 그 시절 자체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그 시절을 거쳤기에 지금의 내가 있기도 하다. <벌새>는 애틋하게 남은 그 시절을 담담하게, 때로는 쓰라리게 묘사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애틋하게 느껴올 감정이다.




<벌새>는 은희의 시선으로 1994년을 보여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뿐인 은희의 시선이지만 그 정서는 은희만의 것이 아니다. 은희에게 달려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하기 버겁다. 가족, 단짝친구, 남자친구, 학교 후배, 학원 선생님은 은희와의 대면에서 각기 다른 감정을 만들어낸다. 단 한 구석도 같은 점이 없다.


이어지지도 않는 두 시간의 사건을 마주하며 관객은 은희를 공감한다. 똑같은 경험은 하지 못했을지라도 똑같은 감정은 꺼내올 수 있다. 94년의 은희만이 아닌, 74년, 84년, 04년, 14년의 은희로 돌아간 관객은 다시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을 떠올린다.


세상이 은희를 때리는 느낌이다. 저 사람들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불합리한 사회의 단면은 은희를 침묵하게 만든다. 세상이 나를 개 패듯이 때려도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친구와 뒤에서 불만을 얘기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담임 선생님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간다고 했다. 부모님 일을 돕고 나서 벌게진 손가락을 펼쳐보았을 때 은희는 혼자 쓰라린 손가락을 만질 뿐이었다.


그런 일상에서 만난 학원에 새로 온 영지 선생님은 세상에 반항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은희는 영지의 속마음을 전부 알지 못했지만 영지는 은희의 마음을 모두 읽고 보듬어줬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영화의 주요 기점이다. 다행히 언니는 무사했지만 오빠가 울었다. 카메라는 식탁에 모여 있는 가족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관객은 개개인의 감정에 집중한다. 언니는 친구를 잃었으며 오빠 또한 누군가를 잃은 것 같다. 살아 돌아온 동생을 향한 안도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개인적인 눈물에 집중한다. 다리가 무너진 것도, 오빠가 운 것도 은희에게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인해 영지가 죽었다는 사실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학원을 떠난 영지가 써준 편지의 약속은 영영 지킬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당당해보였던 영지도 불합리한 세상의 인재로 인해 떠났다. 영지 또한 자신이 싫었던 적이 많았다고 했었다. 그 또한 84년의 은희였을 것이다. 어스름한 새벽녘, 무너진 다리를 바라본다. 카메라는 무너진 다리와 은희, 한강을 길게 담는다. 그동안 관객도 같이 서서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다음 장면은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다. 카메라는 식탁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보편적인 일상의 복귀이다. 나의 주관적 경험은 객관적인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힘든 일이 닥쳤을지라도 아침은 왔다. 가족은 다 같이 아침에 집중한다. 이번에는 모두 같은 감정을 나눈다. 수많은 가족이 수천 번 보냈을 아침이다.


소풍 간다는 생각에 신난 아이들과 함께 영지의 편지가 들려온다.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나쁜 일이 닥치다가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 아이들은 마냥 기뻐 보인다. 그렇지만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두리번거리는 은희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대로 아등바등 살아갈 준비를 한다. 은희를 포함한 주변의 아이들도, 가족들도 일 초에 수십 번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살아간다.




영화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맞냐는 질문에 답을 내놓는다.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동정하지 말 것, 누구라도 자신을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울 것,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삶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은희는 1994년을 지나며 조금 더 성숙해졌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은희도 아직은 부족하다. 얼마를 더 살아야 성숙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상적인’ 매일을 보내는 우리는 언제 성숙해질까.


우리는 새로 산 신발이 점점 더러워져도 내버려두는 것처럼 살아간다. 당연한 것처럼. 내 주관대로 살고 싶지만 세상은 잔인하리만큼 객관적이다. 잠시라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불안해했던 은희는 한 층을 더 올라간 후 감정을 숨긴다. 객관적인 세상은 공감이 아닌 콧방귀를 뀔 뿐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은희는 한 발자국 더 주관적으로 걷기 위해 몇 번을 넘어진다. 그러면서 몸에 밴 흙냄새와 땀냄새는 그 시절의 흔적이 된다. 세상에 휘둘리다 만난 상대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고 나서야 성숙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의 시선은 동정이 아닌 공감으로 마주할 것이다.




<벌새>는 극적인 전개 대신 현실적인 일상을 보여준다. 은희의 체험은 관객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관객이 은희를 공감할수록 은희도 관객을 공감해준다. 모두의 속에 조금씩 숨겨만 두었던 은희는 스크린을 통해 비로소 공감을 받는다.


오로지 은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138분은 지루할지도 모른다. 은희에 대한 공감이 곧 영화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만약 은희와의 대화에 성공한다면, 은희는 약간의 성숙함을 더해줌과 동시에 덜 아문 흉터를 어루만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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