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전화가 또 울리기를,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1년 전 9월,
전화기 너머로 낯선 숨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사는 60대 후반의 남성.
삶이 너무 외로워져서,
약과 술을 삼킨 채,
마지막처럼 잠들었다 깨어난 분이었다.
그분은 내게 말했었다.
“아들 녀석이 이혼한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 듣는 순간, 팔자가 대물림 되는구나 싶었어요.
아내가 떠나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는데...
얼마 전 퇴직금도 친구한테 사기당하고...
모든 일이 왜 이렇게 되었나 싶더군요..
이젠 아무 기대도 안 생깁니다.”
이혼, 배신, 퇴직 후 고립.
잇따른 상실 속에서
그의 마음은 깊은 자기 비난과 우울에 잠겨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몇 차례 전화를 주고받았다.
임의로 끊어버린 약물,
텅 빈 집에서 혼잣말만 늘어가는 일상,
예전처럼 운동도 못 한다는 상실감.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려 했다.
어항 청소를 시작으로
그는 작은 변화를 시도했고,
나는 그 변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해주었다.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기에,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말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이유를 되새기곤 했다.
그리고 오늘,
1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저 기억하시겠어요?”
익숙한 숨소리,
조금 떨리는 목소리.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혹시...힘들어서 전화를 주신 걸까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딱 1년 만이라 생각나서요.
잘 살아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그 한 통의 전화가 얼마나 값진 존재의 증명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덧붙였다.
“작년에 선생님한테 위로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게 기억에 남아서요. 사실, 그때
선생님 전화가 1주일에 유일하게 오는 전화 한 통이었어요”
그날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외로움은 여전하지만,
5월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가 또 살아나셨다는 이야기,
조금씩 실내 자전거를 타고 계시다는 소식.
그리고 나에게 건넨 말.
“선생님은 좋은 일 하시는 분이에요.
자부심 가지시고, 계속 그렇게 살아주세요.”
나는 오히려 더 감사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그 기억을,
그 관계를 내가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께 말했다.
“다시 살아나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분은 조용히 웃으시며 되물었다.
“이유가 있으려나요...?”
“이렇게 전화를 걸어주신 것,
그게 이미 이유 아닐까요?
다시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
그건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오히려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모든 걸 해줄 수 없다는 한계 속에서도
누군가가 "살아있다"고 전화해 줄 수 있는 관계를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왔다는 사실.
그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다짐한다.
이 일이 때론 막막하고
마음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
오늘도 문득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다음 전화는 겨울쯤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때도 살아계시다고,
조금 춥지만 잘 견뎠다고,
그렇게 한 번 더 안부를 전해주시기를,
나는 조용히 바라 기다린다.
※ 본 글은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내담자의 신원 보호를 위해 일부 정보를 변경 및 각색하였습니다. 내담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