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는 <Sex and the City>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브런치 식당에서 소리 높여 섹스를 주제로 대화하지는 않는다. 어엿한 성인이지만 모텔에 들어가는 게 쑥스러울 때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몰래 감시하는 느낌이랄까.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나이 되도록 성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가끔 가는 모텔 거리엔 화려한 스산함이 감돈다. 어둠을 몰아내려는 알록달록한 불빛이 어색하게 빛난다. 그 사이로 다정하게 팔짱을 낀 사람들이 걸어간다. 갓 성인이 된 듯한 20대 초반부터 나이가 지긋이 든 노년까지 모텔은 누구에게나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초단기 부동산 임대업은 나이와 성별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바로 청소년이다.
청소년 보호법은 남녀 혼숙을 금지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영업을 법적으로 처벌한다. 법의 의도가 참으로 선하다.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니, 혼숙은 분명 ‘위험’한 행동일 테다. 그런데 법에서 우려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청소년들이 있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청소년 중 성 경험이 있는 청소년은 5.7%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섹스를 하는 걸까?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절반이 자신의 혹은 상대방의 집에서 한다. 절반은 청소년에게 허락되지 않거나 비위생적인 장소였다. 심지어 공공화장실이나 비상구도 있었다.
청소년 룸카페를 보도하는 기사 제목엔 늘 ‘청소년 일탈’이 포함된다. 청소년 섹스는 분명한 일탈로 간주된다. 일탈의 사전적 뜻은 ‘본디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청소년이 지닌 본디의 목적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공부와 대학이다. 품행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해야 바람직한 학생이다. 이성 교제는 성인이 돼서 하고, 솟구치는 욕구는 운동으로 해소해야 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하고 싶은 건 ‘나중’에 하라는 말을 들으며 살지도 모른다.
다양한 삶을 허술하게 묶으면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숨지 말라는 강압 속에서 이 아이들은 어디로 향했을까. 안전하게 머무를 공간이 없는 아이들은 구석지고, 더럽고, 냄새나는 불결한 공간에 간다. 그곳에서 의미 있는 첫 경험을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교감과 소통, 안정과 배려보단 긴장과 위험을 느낄 게 뻔하다. 누군가의 선택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 선택이 충분히 고민한 끝에 다다른 결론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에게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다. 청소년 또한 이 권리를 가진다. 많은 사람이 이 권리를 ‘마음대로 섹스할 권리’로 해석하며 청소년의 성에 거부감을 표한다. 임신과 성병이 급증하리라 걱정한다. 학교에서 청소년 임산부를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성적 자기 결정권은 ‘마음대로 섹스할 권리’가 아니다. 충분한 정보를 듣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거쳐 선택할 권리를 뜻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청소년의 권리를 침묵 속에 고이 묻어두기를 원한다.
<고딩엄빠> 프로그램이 화제다. 어린 나이에 출산과 양육을 선택한 부모의 삶이 여과 없이 조명된다. 프로그램을 둘러싼 갈등도 거세다. 한쪽에서는 비난을 쏟아낸다. 잘못된 선택, 성급한 판단, 응당한 책임, 불행한 결혼 생활이 미성숙한 부모의 탓으로 치부된다. 한쪽에서는 응원하고 지지한다. 이미 존재하는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불편한 <고딩엄빠>가 계속 방영되는 이유는 뭘까? 청소년 임신과 출산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에 출산한 10대는 918명이다. 적지 않은 숫자다. 918명의 삶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소비됐다. 대놓고 드러내지 못했다. 쉬쉬거리며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자랑하듯 꺼내놓을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오히려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당당하다. 10대 출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을 바꾸고 싶었다거나,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다는 출연 계기를 밝힌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빚어나가는 평범한 청소년일 뿐이다.
물론 해당 프로그램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자인 여성과 성년인 남성의 관계에서 비롯된 데이트 폭력과 가스라이팅의 문제를 섬세하게 짚어내지 않는다. 이는 성적 착취에 가깝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기사에서 이 같은 범죄 행위가 근거로 제시되는 건 경계할 일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누려야 할 권리이지, 청소년에 대한 성인의 학대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은 섹스를 공부해야 한다. 섹스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현실로 소환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상호 합의, 배려, 피임, 임신, 성병, 육아와 같은 것들이 공교육 내에서 다뤄져야만 한다. 섹스를 하라는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음을, 선택 과정에 고려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급진적인 견해가 아니다. OECD는 일찌감치 청소년의 건강한 선택을 위해 정보에 근거한 의사결정,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협상 능력을 강조한 바 있다. 금지와 규제로 너희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니라는 접근보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가르치는 게 더 유용하다. 누구나 그렇듯 당면한 현실 앞에서 아이들 또한 진지해지고 신중해진다. 섹스를 중요하고 무거운 선택으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반응은 처참하다. 이 같은 주장이 성 혁명, 조기 성애화를 일으킨다는 시민단체의 반대가 거세다. 서울시의회는 2023년에 발의한 조례안에서 ‘청소년 성교육은 절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쪽에서 강조하는 절제와 자기 조절 능력은 함께 가르쳐야 할 덕목이지, 유일한 덕목이 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세상은 청소년을 ‘무욕’과 ‘무성’의 존재로 취급한다.
배우지 않으면 준비할 수 없다. 아무도 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대체 어디에서 배워야 한단 말인가? 이것마저 유튜브로, 지식인으로, 구글링으로 각자도생하며 배워야 할까? 학교 교육의 무용론을 펼치는 많은 사람이 학교가 현실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래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치겠다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비난을 퍼붓는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