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review] 당신은 개인주의인가요?
‘나는 개인주의자입니다.’라는 말을 실생활에서 언급했을 때 찾아오는 눈초리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분명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보다 공동체 사회 내에서 이기적으로 개인주의를 주장한다는 시선이 더 많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개인주의’라는 말을 꺼낼 수 없으며, 꺼내는 자체를 꺼려한다. 문유석 판사(작가)는 먼저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하며 독자들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개인주의만을 외치고 있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의견이 맞지 않다고 책을 덮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을 읽고 있는 것처럼 다음 내용을 읽어내고 있었다. 이런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주의’, 집단이나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선시하고 더 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집단주의이자 공동체를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무엇보다 ‘나’ 하나 챙기기 힘들게 되었다.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나’를 희생해서 공동의 성과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회 분위기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 사회와 구성 세대들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곤 한다. 또한, 그 사회와 세대를 구성하며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들 역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이거나 집단주의에 속할 수 있고, 그 외의 또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로만 묶어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선으로 인해 개인은 물론 세대, 사회 간의 갈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다양한 관계가 얽힌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주체인 ‘나’를 잊어선 안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또한, 개인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사회 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 같은 공동체주의 속에서 개인을 잃지 않으며, 자리를 유지해야만 또 다른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주의를 마냥 비판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에 대해 덜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사회를 우선시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 속한 개인 단위일 뿐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과 인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존중받는 사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 긴밀한 관계보다 자신이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나’를 위해 더 나은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소소하지만 즐길 수 있는 행복을 찾아다닌다. 이유는 역시 공동체보다 ‘나’를 먼저 챙기고,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쩌면 우리는 개인주의자가 싫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개인주의 성향을 띄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작가가 판사직을 수행하면서 겪어온 늦깎이 조정 위원의 일화나 나이 어린 증인을 법복 벗고 만난 일화 등 모두 개인의 성취나 타인인 ‘개인’을 위해 행했던 일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속한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하며, 독자들인 ‘나’에게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안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유석 작가가 정의한 ‘합리적 개인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단순히 공동체나 집단이 싫고 포함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주의를 주장해선 안 된다. ‘나’의 자유를 존중받기 위해,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세분화된 개인은 각 세대나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개인과 사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나’를 우선시하는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하지만, 결국 사회와 연결되어 결심했던 것을 포기하는 상황이 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를 미워하거나 져버리지 않는다. 자신을 개인주의라고 칭한다 한들, 우리 사회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소매 걷고 나서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기도 한다. 이는 결국 개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고 전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개인을 지울 필요도 없으며, 개인인 우리가 사회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고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 문유석 작가는 개인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사회를 배제하거나, 이분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배척한들, 우리는 결국 사회 속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단지 있는 것을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사회 이념 속에서 우리는 지금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이념의 갈등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나라는 자신들만의 개인주의를 실현하고 있거나, 현실성 없도록 이상적인 공동체주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타국의 이념을 따라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개발독재 시대에 압축 성장을 이룩한 경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세대가 아직도 많은 우리 사회는 계속된 갈등 속에서 우리만의 이념을 획득하고 완성해야 할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고자 타국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위험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개인’이 만나 형성된 사회는 ‘개인’이 토론하고 관심을 통해 발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