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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green Jan 14. 2023

2021년 어느날

식구에서 가족으로



남편과 결혼하려고

시부모님을 처음 뵈러

어느 한정식 집에 도착하던 날,


시아버지,시어머니

그리고 시아버지 친구라며 한 분이 더 나와계셨다.


자주 입지 않는것 같아보이는

빛바랜 양복을 곱게 두분이서 입고 앉아계셨고


이건 무슨상황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지니

시아버지께서 말씀해주신다.


"여기 이분은, 아버지 제일 친한 친구다.

혼자 지내고 계시고

우리 애들 키울 적에 같이 키우고

밥도 같이먹고 거진 가족이니까

우리 함께 정 내며 살쟤이~"



그렇게 나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아지아'라 부르는

 분의 어른과


시댁에 가면 함께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다니며

매년 두번씩 가족여행을 다녔고

아이의 돌잔치도 함께 했다.


둘째아이의 100일을 

새로 산 집에서

집들이겸

모두 다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친정에서는 첫 집이라고

결혼식비용과 동일하게 100만원을 주셨고

돈에 욕심이 많은 나는

집들이 겸 들어온 돈을

빌트인 화장대 서랍에 고이 보관하며

두툼한 봉투를 보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해 여름,

'아지아'의 사업이 확장되어

타지에서 대표를 맡아 일을 하기위해

시아버지는

하시던 일을 그만두셨다.


작은 상가 하나에서

성실하게 일거리  맡아하시며

푼돈을 만지시며

욕심없이 사시던 시아버지는


타지에

처음 맡은 사업의 부담감때문일까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서 막막하셨을까


아니면 요즘드라마 대사처럼

원부모로부터

한번도 가득 채워져 본적이 없어서

나와 같은

채워도 채워도 가득 채워지지않는

삶의 공허함때문이었을까


증조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던 날

연락이 되지않던 시아버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다.



그렇게 나를 미소짓게하던

돈봉투는

고스란히

시아버지의 시신을 옮겨오는데 사용되었고


연이은 시어머니의 암 진단 소식까지 들리자

이집에 혹시

재수없는 내가 시집을 와

이런 일이 생긴게 아닐까, 생각 하며

그저 조용히

'이집의 종이 되어야겠다'

되도 안한 다짐을 했던 때였다.



남편은 출근을 하지않고

아버님 묘에서 하염없이 울다 오기 일쑤였고


시어머니는

항암으로 인해 머리는 다 빠지고

시내를 걷다

맥이 풀려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있노라면

지나가는 행인이 일으켜 달래고

벤치에 앉혀주곤 했다.



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가족 모두는

다들 자기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들했다.



그때 그 암흑의 시간을 같이견뎌준건

아지아였다.



"미안하다,

다  나때문이다. 미안하다.."


시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사업을 권유하셨던 아지아는

다 자기때문이라며

무릎을 꿇으시고

사죄를 하셨고


그때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무언가 약속이라도 하신듯

묵묵히 우리가족의 곁을 지키셨다.



어머니의 항암투병도

아지아는 함께다녀주셨고

우리 두 아이들의 어린이집 모든행사도,

갑자기 아버지를 잃고

벽걸이 에어컨, 커튼 봉,

벽에 걸린 모든것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남편을

아들로 품으신것같았다.



그뒤로 몇년을 이렇게 함께

상처많고 외로운 이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 식구에서

얼마전 가족이 되었다.



"나는요, 딴건 다 모르겠고요.

아지아가 어머니곁에서 서로 위해주고

아픈상처 서로 보듬고 오래 잘 지내주시니까

이제 아버지라고 부를거에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아버지대로

내가 마음속에 잘 품고


곁에계신 아버지는

내가 진짜 아버지로 잘 모실거니까

지켜봐주세요.."

남편이 '아지아'앞에서 운다.


아지아도 우시고

어머니도  우시고

나도 울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더없이 좋은 가십거리다.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다시 남편으로 맞이하고

가족으로 살아간다는것은

좁은 동네더없이 맛있는 안주거리겠지.


우리가족 또한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각자 혼란한 마음을 다스려야했으니


한동안의 소란은

기꺼이 감내해야했다.



하지만

꼭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인가


피를 나누어도 가족같지 않은 이들이

내주변엔 숱한데


오래 밥을 나누어 먹고

내 곁에서

한번도 받아 보지못한

부모의 정이라는것을 듬뿍주시며

든든히 곁을 지켜주시는

'아지아'가

그렇게 나의, 우리의 가족이 되어주셨다.



23년 1월,

둘째 아이를 깨운다.


"jj야~ 하부지랑 목욕탕갈까~

하부지랑 싸우나 갈까요~~

애비야~  일어나~같이가자~"



아버님, 남편, 우리 아들이

대천 리조트 스파를 하러

사이좋게 내려간다.



결혼 사기를 당하고

몇번의 사업 실패로

철저히 바닥까지 혼자 쳐박혀

속리산 여인숙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다던



지독하게 외로움의 상처를 안고살던

아지아가

내 시아버지가 되었다.






그렇게 우린

식구에서 진짜 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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