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에 눈을 뜬 게 언제였더라, 돌이켜보면 가물가물하다.
엄마와 함께 보던 드라마에서 남녀주인공이 키스라도 할라치면 왠지 아랫도리가 찌릿해올 때였을까.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엄마 따라간 미용실에서 여성중앙 같은 여성지의 뒷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워넣고, 누가 볼세라 페이지를 잽싸게 오가며 성 상담 페이지를 훔쳐볼 때였을까.
엄마가 사준 한국문학전집의 단편소설을 탐독하다, 야한 장면이 많은 소설을 '네놈이구나' 기억해두었다가 보고 또 보았을 때였을까.
아마도 국민학교 4~5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이성에 눈을 뜨고 성(性)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던 건.
그렇게 어린 아이였다, 소녀였다, 아가씨였다, 아줌마가 되기까지 내게 성은 단계별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린 아이 시절에는 영문을 알 수 없이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지의 세계로, 소녀 시절에는 할리퀸 로맨스와 소설에서 만나는 낭만의 결정체로, 연애 시절에는 책으로 배운 지식을 실전에 응용해보는 실체로, 그리고 아줌마가 된 지금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귀찮은 일상으로 말이다.
이제 곧 만으로 10살, 7살이 되는 딸 둘을 키우며 다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드라마를 보는데 언제 옆에 왔는지, 7살 난 딸이 키스하는 남녀 주인공을 보고
"엄마, 나 저런 걸 보면 쉬야가 마려워." 라고 말한다거나 12살 난 딸이 WHY 사춘기와 성을 여러 번 읽고, 내게 "엄마, 나 로션을 '난자'만큼만 짜주세요." 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내가 사춘기를 보냈던 그 시절과 지금 2020년 사이에는 30년의 간극이 있고, 우리는 한국을 떠나 성에 개방적인 이탈리아에 살고 있으니, 노출 강도는 나때와 비교할 수 없다.
나야 어린 시절, 부모님이 산 비디오 플레이어에 사은품으로 딸려왔던 영화 테이프 '라붐'에서 첫 키스신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아이들은 그보다 훨씬 어린 시절부터 성을 접했다. 디즈니는 각성해야 한다. 왜 꼭 어린 아이들 보는 만화영화의 엔딩에 남녀 주인공이 입벌리고 프렌치 스타일로 키스하는 장면을 넣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사실적이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어느 날인가, 5살이었던 딸래미가 오더니
"엄마, 남자친구랑은 쪽 하고 뽀뽀하는 거 아니잖아. 이렇게 하는 거잖아."
하면서 입을 벌리고 나한테 다가오는데, 아 산산이 조각난 동심이여. 디즈니가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게다가 이곳은 동네 공원에 나가면 포갠듯 붙어 앉아 정렬적으로 키스하는 연인들이 수두룩하다. 아이들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체 하고, 실은 볼 것은 다 챙겨 보면서 배시시 웃으며 옆을 지나간다. 나땐 VHS 비디오로 학습하던 것들을 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간접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로 건너오기 전,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탈리아는 인종차별이 심하다던데, 괜찮을까 걱정했더니 친구가 단번에 이렇게 대답한 거다.
"야, 지금 인종차별 걱정할 게 아니야. 딸들을 이 험한 유럽 땅에서 어떻게 키울지 걱정해야지. 나 우리 상사 얘기 듣고 깜짝 놀랐잖아. 우리 상사가 네덜란드 사람인데 열여섯짜리 딸이 있거든. 근데 이번 여름 휴가 때 가족여행에 딸 남자친구를 데려갔대. 남자친구네 부모님 허락 받아서 데려갔는데, 글쎄 숙소에서 딸하고 남자친구한테 한 방을 내어줬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이게 아무렇지도 않아. 이 가치관의 간극 어쩔꺼야. 남일이 아니야. 지금 인종차별 걱정하고 있게 생겼어?"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열여섯짜리 딸을 뭐가 어쩌고 어째?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뤄도 부모님이 옆방에 계시면 합방을 삼가게 되는, 동방예의지국 출신으로서는 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성관념이 완전히 다른 낯선 땅에서 딸 둘을 어떻게 키워야되나, 어떻게 키워야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들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큰 딸이 만으로 10세인지라, 아직까지는 크게 성 문제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자기만의 세계가 생기고, 그 세계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엄마아빠가 모르는 아이만의 비밀이 점차 많아질 것이다. 사람마다 그 시기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누구나 그런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고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다.
아이가 내 품을 서서히 떠나는 과정에서, '이것도 하지마, 저것도 하지마' 하며 간섭해 아이를 더 멀리 밀어내는 엄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아이가 가장 비밀스러운 고민을 들고 찾아와주는 엄마가 될 것인가. 나는 당연히도 후자가 되길 바란다.
막 2차성징이 시작되고 가슴 몽우리가 생기던 무렵, 나는 그게 그렇게 부끄러워 감추고만 싶어 가슴을 잔뜩 웅크리고 걷곤 했다. 그걸 생각하면 내 아이도 그러는 게 싫어 나는 아이에게 말한다.
"XX이가 많이 컸다, 그치? 가슴이 나오는 건 진짜 예쁜 여자가 되는 과정이야. 지금은 조금 아프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정말 아름다운 몸매를 갖게 되는 거거든. 그러니까 가슴 쫙 펴고 당당하게 걸어. 알겠지?"
하면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엄마, 나도 알거등. 우리 반에선 &&이가 제일 많이 나왔고, $$이가 제일 작은데 여자애들끼리 모이면 누가 많이 나왔는지도 비교해. 애들은 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대."
과연 나 때와는 다른 반응이다.
이제 딸들은 머잖아 초경을 할 것이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첫 성경험도 할 것이다.
물론, 서양에 산다고 이들의 기준에 맞춰 빨리해도 좋다고 그린카드를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딸이 남자보는 눈을 키우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한 뒤 어른이 되길 원하는 건 모든 부모의 바람일 테니까. 게다가 첫 경험이 늦으면 늦을수록 연인과 더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는 연구결과도 여럿 있었으니, 나는 과학을 앞에 내세워 딸들을 살살 설득해볼 것이다.
한국식 간섭주의 유전자를 버리고 입술 꼭 깨물고 하고픈 말 참아가며, 왠만하면 딸들의 성에 간섭하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그리고 아직은 너무나 이른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인생 선배로서 우리 딸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얘들아, 노콘노섹, 노동영상은 꼭 지키며 살자."